가을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나무들은 색동옷으로 갈아입고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한껏 뽐내고 있다. 창밖에 우뚝 솟아있는 감나무에는 빨간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앞산 언덕에는 들국화가 만발해 있다. 벌써부터 풍성한 가을의 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사람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가을을 상념의 계절이라고 했다.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은 늙으신 부모님 생각에다 멀리 헤어져 살아가고 있는 형제자매들의 소식이 궁금해진다. 어릴적에 함께 자라난 옛친구들이며 연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가을이 깊어지면 생각나는게 또하나 있다. 옛날 어릴적에 살았던 고향집이다. 지금은 허물어져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고향집은 옛날 그대로다. 우리집 바깥마당 옆에는 팽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이 나무의 높이는 15m 이상이었고 나무의 둘레는 어른들의 서너 아름은 되었을 것이고 수령은 적어도 300년 이상은 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을이면 이 나무에는 작은 콩알만한 주황색 열매가 수없이 많이 매달려 있었다. 팽나무 열매는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에게는 인기있는 간식거리가 되었다. 우리 가족은 이 나무 때문에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었고 가을이면 동네 아이들에게 이 나무의 열매를 주워먹게 함으로 인심도 쓸 수가 있었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이 나뭇가지에 그네를 매고 우리 형제들은 그네타기로 긴긴 겨울도 지겹지 않게 보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는 우리 가족이 감기만 앓아도 이 나무에 금줄을 치고 가족의 건강을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나무는 우리 가족의 안녕을 지켜주지 못했고 우리 가족이 이 집을 떠나면서 죄없는 나무는 잘리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가을이 오면 이 팽나무에 대한 추억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지만 이 나무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도 마음속에서 지워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겐 또하나의 추억속의 나무가 있다. 나무중에 왕이라고 일컬어지는 자작나무가 그것이다. 나는 1992년 늦은 가을, 강원도 태백지역을 관광하면서 처음으로 자작나무를 볼 수 있었다. 잎은 다 떨어지고 볼 수가 없었지만 함박눈이 내린 겨울산을 연상하리만큼 하얀 몸체를 드러내고 있는 자작나무의 군락지를 바라다보면서 신비스러운 감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무들이 몸통을 드러내놓고 몸 단련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무들이 무슨 수도를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자연의 신비함을 인간의 서툰 언어로 빚어낼 수는 없지만 자연속에서 숙연함을 배울 수가 있었다.
 
이같은 경험을 한 후 십수년이 지난 후에 필자는 중국을 여행하면서 자작나무의 숲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에서 무수한 자작나무의 숲을 볼 수 있었고 백두산 자락에는 온통 자작나무의 숲으로 뒤덮여져 있었다. 예부터 압록강 건너편을 서간도라 했고 두만강 건너편을 북간도라 했다. 서간도와 북간도는 그 옛날 고구려의 땅이었다. 지금도 연변을 중심으로 200만명 이상의 조선족이 동북 3성에서 살아가고 있다. 연변에서 만난 조선족들은 자작나무가 조선족의 기상이라고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자작나무에 대한 애착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자작나무의 표면이 하얀 것은 우리 민족이 백의민족이라는 점과 상통하고 자작나무가 척박하고 춥고 황량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은 세계 어느곳에 가서도 그곳에 쉽게 뿌리를 내리고 잘 살아가는 민족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작나무는 군락을 이루어 자라가고 있다. 자작나무의 숲은 사람들이 발길을 들여놓기가 어려울 정도로 서로가 밀착해서 살아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인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민족의식이 강하고 단결이 잘되는 민족이라는 점에서 자작나무는 조선족의 기상과 너무나 일치한다고 했다.
 
필자는 이 자작나무가 금년 3월1일에 개교한 신곡초등학교(김포시 고촌면 신곡리 소재) 정원과 주변에 다수가 심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잔잔한 충격을 느낀 바가 있다. 나는 학교 주변을 지날 때마다 자작나무의 생육상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비록 척박한 땅이지만 잘 자라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 자작나무는 가을이 깊어지면서 성장을 멈추고 낙엽이 한잎 두잎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성한 잎사귀 속에 깊이 숨겨 놓았던 몸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하얀 피부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태백지역과 백두산과 중국의 연변지역에서 보았던 자작나무가 틀림없다. 그래도 나는 확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 나무를 식재한 김포시에 확인까지 했다. 나는 이 나무가 어디서 옮겨왔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 학교의 교정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어린이들로부터 사랑받는 나무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 세계는 지구 온난화 문제로 큰 고민에 빠져있다.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 유엔환경보고서에 의하면 과다한 화석 연료 사용이 그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따라서 대책은 화석연료를 대폭 줄이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할 수 있는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다. 우리는 나무의 재화 가치를 알고 있지만 나무의 공익 가치는 무시하는 경향이다. 뿐만 아니라 나무의 교육적 가치는 더욱더 중요하다. 나무는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정서함양은 말할 것도 없고 실물교재로서의 활용도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나는 새로 개교한 이 학교에서 자작나무의 하얀 피부처럼 순수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자작나무의 강인함처럼 의지가 굳은 사람,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최고의 재목감으로 자라나는 자작나무처럼 쓸모있는 사람들이 많이 자라나 주었으면 하는 염원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