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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까? 거의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두뇌로 기억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용량은 어느
정도일까? 한자를 몇자나 기억할 수 있으며 영어사전을 통째로 기억할 수 있을까? 인간의 상상력은 한계가 없지만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기억력으로는 인간이 컴퓨터를 따라갈 수 없지만 상상력에는 컴퓨터가 인간을 따라올 수 없다.
인간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나 머릿속에 기억하려는 것은 욕심이다. 그래서 꼭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만 골라서 기억하면 되는 것이다. 기억하기 어려운
것은 문서로 남기거나 컴퓨터에 입력해두면 된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수요일밤 예배에 다녀온 나의 내자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느닷없이 예수님의 족보를 외어보란다. 예수님의 족보에 관한 내용은 신약성경 마태복음에 나온다. 나는 아내가 왜 나에게 이같은 시험을
하는 지가 궁금했다. 나의 기억력을 시험해 보기 위함일 수도 있고 내가 모른다고 하면 주일학교 아이들도 다 아는 것을 왜 모르냐고 나를 무시코자
함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자신도 없거니와 아내의 속셈을 파악한 나머지 당신이 먼저 당신 조부모님과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함자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당혹스러워 했다. 이때 나는 나의 직계 조상들의 함자를 하나도 빠짐없이 줄줄 외어갔다. 그리고 난 후 자기 할아버지 함자도 모르면서
예수님의 족보는 왜 들먹거리냐며 면박을 주었다. 그런 다음 우리의 논쟁은 제2라운드로 진행됐다.
아내는 나에게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66권의 책명을 순서대로 외어보라고 요구했다. 이도 마찬가지다. 내가 모르는 내용은 아니지만 아내의
의도를 알고 있는 나는 거부감을 느낀 나머지, 당신 눈썹이 몇 개인지 알고 있느냐? 고 되물었다. 그것을 말해주면 나도 당신 질문에 답하겠다고
했다. 아내는 내가 모르면서 억지를 쓰고 있다고 했다. 억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똑똑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면 무엇이나 많이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내의 잘못된 생각을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복잡한 세상에서 생활하려고 하면 가능한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담아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수많은 서적과 컴퓨터를 항시 지니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꼭 알아야 할 상식과 자기가 전공한 분야의 전문지식만 기억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시대에는 소위
만물박사가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전문지식에 정통하고 있는 사람이 우대받게 되어있다.
필자는 이 논쟁을 통해
오래된 부부 사이에도 항시 위기는 있기 마련이고 상대방을 시험하려고 하거나 무조건 기를 꺽으려들면 뜻밖의 반발을 사서 가정의 평화가 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부부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살림을 함께 책임지고 있는 여야 정치인들 사이에도 불필요한
우문우답에다 동문서답이나 묵묵부답을 되풀이하다보면 별것도 아닌 문제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그 실례를 들어보자. 9월3일 국회 기획재경위원회에 참석한 강봉균 의원과 강만수 기획재경부 장관 사이에 주고받은 질의와 답변
내용이다. 이 자리에서 강의원은 강장관에게 “대학생 등록금이 일년에 얼마인지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해 강장관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 보이며 “알고는 있습니다만 꼭 그렇게 물어야 되겠습니까?” 라고 했다.
국가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장관이 이
정도는 알고있어야 하겠지만 정확한 대답을 못했을 때 장관이 그것도 모르냐고 몰아세울 게 뻔한 질문에 심한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장관이 대학에
따라, 그리고 학과에 따라 세분화되어 있는 대학 등록금을 일일이 모를 수도 있다. 장관이 대학생 등록금이 얼마인지 정확히 알아맞히지 못했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도 없다.
기획재경부 장관이라고 해서 국민들의 식탁에 오르는 조기 한 마리, 갈치 한 마리, 도미 한 마리, 고등어 한 마리 가격까지 일일이 기억하고
있을 수 없다. 장관이 이런것을 몰랐다고 해서 자격이 없는 장관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국회라고 하면 좀더 높은 차원에서 국정을 다루어야
한다. 물가가 왜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는지, 실업문제가 왜 심각해져가고 있는 것인지, 국제수지가 왜 악화되고 있으며 9월 위기설의 실체는
무엇인지 그 원인을 따지고 대책을 물어야 한다. 국민들이 진짜 궁금해 하는 문제들은 덮어놓고 우문우답으로 감정싸움만 일삼는 국회를 더 이상
지켜보기 어렵다.
문제는 또 있다. 지난 7월23일 국회 민생경제 현안 질의에서 송영길 의원은 강만수 장관에게 “삼겹살
600g 가격을 아느냐”고 묻자 강장관은 “모릅니다. 평소 삼겹살을 잘 먹지 않는다”고 했다가 민주당 의원들로부터 “경제팀 수장이 삼겹살 가격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심한 면박을 당한 일이 있었다.
장관이 중요 생필품 가격 동향을 살피고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만 수시로 변하는 가격을 줄줄 외우고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은
삼겹살이라도 지역에 따라, 매장에 따라, 품질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정육점 주인이 아닌 이상 그러한 정보를 정확히 알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질의와 답변 또한 우문우답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힘겨운 국민들은 국회의원들의
이같은 모습을 바라보면서 산다는 것이 더욱더 힘들 수밖에 없다. 만약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불러놓고 경주 불국사의 기왓장이 몇장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당신 눈썹이 몇 개인지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같은 우문우답이나 즐기며 살아갈 여유가 없다.
이제 무덥고 다습했던 여름은 물러가고 아침저녁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며칠 후에는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한가위를 맞이하게 된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가족들도 만나게 될 것이고 기러기떼들도 날아오게 될 것이다. 생각만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때쯤이면 우리 부부는 저녁 산책을
즐기며 소원해진 부부의 정을 다짐한다. 덕수궁 돌담길보다 아름답고 운치있는
한화아파트 앞에서 현대아파트로 이어지는 샛길에는 벌써부터 돌틈 사이로 가을 꽃들이 피어있다. 보랏빛 벌개미취의 향기는 가을의 정취를 한껏
드러내고 있어 너무나 매혹적이다. 이제 우리 정치도 계절의 변화와 함께 바뀌어져야 한다. 여야가 트집만 잡고 싸움만 하는 정치에서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는 정치, 생산적인 정치, 희망을 주는 정치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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