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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나는 부산을 방문한 일이 있다. 대학원 동기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김해국제공항에 내리자 친구 내외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부산에서도 동쪽 끝인 해운대에서 한시간 가까이 운전을 해서 마중을 나와 준 분들에게 참으로 고마움을 느끼며 촉박한 시간 때문에 서로의 안부를
물을 틈도 없이 모임 장소로 달려갔다.
우리의 첫 번째 화제는 4월9일에 실시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였다. 00지역에
출마한 집권당의 000씨는 00회원들의 방해로 낙선의 쓴잔을 마셨다는 등 한나라당의 텃밭이라고 하는 부산 경남지역에서 일어난 선거 이변이 이
지역 주민들에게도 적지않은 충격을 주고 있었다.
나는 50년 가까이 친교를 쌓아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적과
동지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나의 머릿속을 스쳐가고 있었다.
나는 평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적은 원수가 아니라 파트너일 뿐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정치는 전쟁이 아니다. 전쟁은 총과 칼로 하는 것이지만 정치는 말과 편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는 이미 정도를 벗어나 정적이 원수로 변해가고 있다. 같은 당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
살아온 사람들이 공천문제를 둘러싸고 서로가 원수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공천 탈락자들이 탈당을 해서 다른 당을 만들거나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정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같은 결과가 누구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불공정한 공천이 원죄일 수도 있고 쌍방이 책임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책임이 어느쪽에 있던 간에 서로가 지켜야할 것은 지켜야 하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넘지 말아야 한다. 정치는 전쟁이 아니며 정적은 원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평생을 같이해 온 동지라고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설 때 동지관계는 깨어지고 정적이 되거나 심하면 원수관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말에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다. 한 침상에서 같이 잠을 자면서 각각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말이다. 한 침상에서 같이 잠을 자는 사람은 부부관계라고 할 수 있다. 부부는
옛날부터 일심동체라고 한다. 같은 침상에서 함께 잠을 자면서 서로가 다른 남자,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 부부는 어떻게 될까? 이러한
부부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고 언젠가는 별거를 하거나 이혼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같은
정당이라고 하면 이념이 같아야 하고 지향점이 같아야 한다. 같은 정당에 소속된 정당인이라고 해서 생각과 뜻이 동일할 수는 없겠지만 목표와
지향점은 일치해야 한다. 그래서 정당에는 정강과 정책이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은 정당인들이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한 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할 수있다.
중국의 고사성어에는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손자(孫子)의
구지편(九地篇)에 나오는 말이다. 어느날 원수관계인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게 되었다. 그날따라 크게 바람이 불어 배가 전복될
위험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때 두사람은 서로가 양손처럼 협력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원수 사이도 경우에 따라서는 협력해야 서로가 살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가 하면 협력은 미덕(美德)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그래서 정치에도 상생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한 배를 타고 일시적으로 협력을 해서
위기를 모면했다고 이 두 사람이 동지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같은 협력은 그 추구하는 바가 끝나면 본래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원수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각각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당을 만드는 일이나 협력하는 것은 오월동주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국익과 공익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기들의 사익을 위해 정당을 만들거나 이같은 정당이 권력을 잡아서도 안될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의 ‘생명에 새겨진 사랑의 흔적’이라는 책을 읽은 일이 있다. 저자는 그의 친구 마에가와 다다시 사이에
주고받는 서신들을 정리해서 이 책에 옮겨 놓았다. 아야꼬 씨는 이 책에서 “길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은 함께 의논하지 않는다”고 했다. 길을
달리 한다는 말은 의견이 서로 다르다거나 상대방에게 무슨 과실이 있다는 말은 아니라고 전제하면서 그러나 자기가 천시하는 것을 상대방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가 냉혹하다는 것을 상대방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라면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은 것을 상대방이 감히 해치워버리고
그러고도 조금도 이상히 여기지 않고, 자기라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에 상대방이 침묵만 지킨다면 문제는 크게 어긋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같은 차이를 “두 사람의 길의 차이”라고 했다. 이같은 길의 차이, 사물을 보는 시각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가 현격하게 다를 때에는
동지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동지는 사소한 문제나 큰 문제나 쉽게 공감대를 이루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사사건건 갈등과 대립으로 맞서며
분열만 일삼는다. 이같은 사람들은 길을 같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지금 한국의 정당정치가 큰 위기를 맞고 있다.
건전한 양당정치는 이미 오래 전에 실종되었고 보수는 보수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핵분열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정치 지도자들의
민주적 역량이 부족한 것이 그 첫째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두 번째는 정당에 정치 이념이 없고 한 배를 타서는 안될 사람들이 한 배를 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정치인들이 국가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기 보다 자기의 사익을 쫒고 있기 때문이다.
명분없이 당을 깨고 이합집산을 일삼는 사람들도 그렇고 어떤 면에서 보아도 당을 같이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작당을 해서 정치를 하겠다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십 수억원의 정치헌금을 내고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사람도 그렇고 이러한 사람들의 돈을 받고 유력한 전국구 후보로 추천해 주는 것도
그렇다. 모두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다. 이러한 정치에서 국민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동상이몽은 새벽이
오기 전에 깨어져야 하고 서로가 손을 잡을 수 없는 원수가 탄 배는 파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고비용 저효율의 전근대적 정치로 국민들의
부담만 늘어가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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