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입니다. 영화관에선 매주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개봉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볼거리, 무시무시한 공포, 유쾌한 웃음. 날씨 좋은 주말에 사람들이 굳이 어두컴컴한 극장을 찾는 건 현실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것들을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현실이 괴롭고 고단할수록 점점 영화에 빠져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두 시간쯤 어두운 극장 안에서 영화에 몰입해 있다보면 힘들고 짜증나는 현실은 어느새 남의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주인공이 되어 스크린을 누비고 다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여름 시즌의 포문을 연 영화는 볼프강 피터슨 감독의 <트로이>입니다.
<트로이>는 호머의 <일리아드>를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와 사랑에 빠집니다. 사랑에 눈이 먼 두 사람은 트로이로 도주하고 아내를 빼앗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치욕감으로 자신의 형이자 미케네의 왕인 아가멤논에게 복수를 부탁합니다.

신화는 이제 눈앞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삼천년 전의 전설은 이제 살아 움직이며 현대인들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어린 시절 바다의 여신 테티스가 자신이 낳은 아킬레스를 불사신으로 만들기 위해 스틱스 강에 담그지만 손으로 잡고 있었던 발뒤꿈치에는 강물이 묻지 않아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아킬레스건을 만지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불사신 아킬레스는 아킬레스건에 파리스의 화살을 맞고 죽게 됩니다. 이제는 컴퓨터 바이러스 때문에 유명해진 트로이의 목마는 어떤가요. 헥토르의 장례식을 위해 휴전했던 12일 동안 불에 탄 나무로 만들었다던 거대한 목마가 눈앞에 현실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조국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용맹이야말로 ‘진짜사나이’의 표상이니까요. 자기가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전쟁터로 떠나는 아킬레스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롭게 일생을 살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느니 죽음을 통해 영원히 기억되고 싶어 하는 아킬레스는 누구나 한번쯤 꿈꾸었을 지도 모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호머의 <일리아드>는 ‘사람’이 아닌 ‘신’들에 관한 서사시입니다. 아킬레스의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인간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좌중에게 던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씌어진 황금사과를 놓고 세 명의 여신이 다투게 됩니다.

아테나, 헤라, 아프로디테 세 여신은 서로 자신이야말로 그 사과의 주인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신들에게 판결을 부탁하지만 모두 거절합니다. 그러던 중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판결을 부탁합니다. 아테나는 지혜를, 헤라는 권력을,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짝을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사과의 주인으로 선택하게 됩니다.

이처럼 <일리아드>에서 신들은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 인간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영화 <트로이>에서는 요즈음의 종교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황금사과를 들고 서로 주인이라고 우기는 여신들과 스크린 앞에 앉아있는 현대인들이 서로 친해지지 못할 거라는 감독의 친절한 배려 때문이었겠지요.

영화는 점점 화려해지고 웅장해지지만 결국 영화가 꿈꾸는 것들, 관객들이 바라는 것들은 ‘사람’의 이야기라는 건 변하지 않는 진실인 것 같습니다. 삼천년 전의 남자들도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었었다는 걸 보고 있노라면 사랑이 위대한 건지, 사람이 위대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