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은 유리창이 부서지도록 몰려온다. 낮은 겨울 해는 수줍음이 많은지 똑바로 치켜 뜨고 바라 볼 수가 없다.

오후의 나른함이 햇살처럼 온몸으로 쏟아져 오는데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듯 돌아 누워 지금쯤 도착했을 그녀의 시간을 가늠해 본다.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엔 어젯밤의 목소리가 아스라히 맴돌고 있다.

"우리 지금 만날래."
"미쳤니 이 시간에 어딜 나가."
"그렇겠지."
"그럼 다음에 올라오면 보자."

전화를 끊고 나니 씁쓸한 습기같은 것이 마음을 쓰리게 했다. 그녀가 서울에 올 때마다 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이고, 매번 다음을 기약해도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 친정에 온다는 전화를 받고 걱정스러웠다. 크리스마스를 기해 아이들을 맡겨두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어머님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무언이지만 그 서늘함이 당분간 외출 금지령쯤은 된 것 같은데 느닷없이 올라오다니 … 무슨 일이 있어도 얼굴 한 번 보고 이 해를 보내자던 약속을 전화로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남은 날짜는 달랑달랑 며칠 뿐이다. 힘없이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이번에도 그녀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은 소리 없이 적중하고 있었다. 그녀도 모처럼 올라 온 서울에 볼일이 많았는지 만나자는 전화가 없이 며칠이 흘렀다.

그러던 어젯밤에 떠나기를 앞두고 전화를 했다. 들뜬 목소리로 만날 것을 제의했을 때, 나는 이미 어두워진 거리로 나갈 수 없는 처지를 생각했고 퉁명스럽게 대답해 버렸다.

혼자의 몸이라면 오밤중에 나가 신새벽에 들어온들 별일이 없겠지만 냉정한 현실은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는다.

"나는 나를 이해하여 주는 친구를 가졌고, 또한 그 우정은 내가 매일 겪어야 하는 마음의 상처와 불쾌감보다도 내겐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은가? 어느 시인의 시 한 구절을 그녀가 보냈던 편지 속에서 발견했다.

한때는 이성간의 사랑보다 더 좋은 우정이랑 사랑을 나누던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 전부라고 여기며 변치 않은 우정을 수시로 약속했었는데, 불과 몇 년도 안되어 서로의 마음은 우정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다. 말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서로에게 이성이 다가오고 나서부터였다.

우리는 사물을 보는 눈도 비슷했고 취향도 같았다. 행여 이성에 대한 이상형도 같아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가슴 아픈 줄다리기라도 할것 같았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상상이었다.

친구의 애인을 보자 호기심보다는 질투와 배신감이 가득해지는 마음을 의식하고 말았다. 컴컴해지는 마음을 감추고 두 사람의 만남을 축하해 주었지만, 그 날 나의 행동이 어색했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그녀가 던져 주는 부케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결혼을 했다. 아내의 자리 엄마의 자리란 꼼짝 할 수 없게 우리들의 우정을 망각시겼다.

서로의 현실만 돌아보게 할 뿐 청춘의 약속 같은건 희미하게 빛 바래져 갔다. 여자들의 우정이 남자들의 우정보다 지조가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했다.

남편 직장을 따라 내려간 대전이라는 도시에서 그녀는 타향살이를 하고 있다. 이사를 간다고 할 때도 그저 담담한 심정으로 잘가라고 대답했었다. 서울에서도 자주 못 만났었는데 대전쯤의 거리는 이별을 이별로 다가오게 하지 않았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물거품 같은 우정이었지만, 그것마저 나를 비켜간 사춘기였다면 힘겨운 방황을 했을지 모른다.

우리는 열 여덟 살에 만났다. 자리 배치가 이루어진 새학기에 그녀는 긴 생머리를 얼굴처럼 바라보도록 내 앞에 앉았다. 반머리를 하고 핀을 꽂은 그녀의 머리카락은 항상 끝으로 뻗쳐있었다.

과녘을 향해 날아갈 준비가 끝난 화살처럼 뻗뻗한 머리카락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조심스럽게 머리가 마르기 전에 안으로 말면서 빗어보라고 말해주었더니, 그후로 그녀의 머리는 차분해졌다.

우린 그렇게 친해졌다. 성격은 서로가 달랐다. 나의 겉모습이 선머슴 같고 여린 반면, 그녀는 마음은 선머슴이고 외형은 다소곳한 여자였다.

결혼 후 그녀의 집에 놀러갔을 때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집안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 놀라고 온 적이 있다. 그런 반쪽들이라 한쪽으로 끼워 맞추기가 힘들지 않았던지 우리는 부부로 치면 궁합이 잘 맞는 사이처럼 언제나 함께였다.

어느새 똑같이 머리를 자르고 반머리 핀을 꽂고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똑같이 사서 쌍둥이처럼 입고 다니기도 했다. 어느 날 한 권의 노트 가득 손수 만든 시화집을 내밀었을 때 그녀의 마음씀에 눈물을 글썽였다.

우리는 많은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계획한 것이 여행이었다. 열 여덟의 가을쯤이었을까, 1박 2일의 예정으로 동해 안을 찾아갔다. 내가 바라본 바다는 회색 빛 물결에 갈매기가 나르는 서해였는데 눈부시게 푸른 동해를 보는 순간 또 다른 바다에 감격하고 말았다.

여행의 피로도 잊은 바닷가에서 촛불을 켜고 뒤척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우리의 우정이 저 바다만큼 푸르게 영원하자고 맹세했었다.

그랬었는데, 좋은 것은 다 너에게 주고 싶었던 지난 날은 어디로 가고 이제는 남편과 아이가 먼저 떠오르니 너는 이제 나의 마음 쪽 동구 밖쯤에 있는 것은 아닌지…

겨울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오는 이불 속에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지난 날의 우정이 시리도록 아파와서 이대로 누워 있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