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가까워졌습니다.
들에는 벼가 익어갑니다.
감도 익어갑니다'

초등학교 1·2학년 8단원 쯤이었죠?
맑은 가을볕에서 한껏 단물을 빼문 실한 열매들이나 누렇게 변해가는 들녁을 마주하면 예의 국어책 '추석' 단원의 물감 번진 수채화가 떠오릅니다. 마음은 어느덧 어린시절 추석 즈음으로 순간 이동 하구요.

삼십오년 전쯤 얘기지요. 사방이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삼태기 모양의 작은 두메산골에 사는 어린 것들의 추석은 부모님들의 추석빔 장만 약속에서 비롯됩니다.

가을걷이가 채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마을 아낙들은 먼저 말린 고추과 콩류을 포대와 자루에 담아 이고 대목장을 찾아 이십리길 산고개를 줄지어 넘어갑니다.

어린것들의 기다림은 여느 때보다 여나무발은 길어진 지루한 하루 해가 산그림자를 몰고 마을 어귀를 벗어날 쯤에서야 끝이납니다.
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던 꼬맹이들 시야로 삼삼오오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행렬이 들어옵니다. 냅다 달려나간 애들에게 물려지는 알록달록 무늬곱던 무지개 사탕… 단맛 가득 머금고 마을로 들어오던 볏가리 논둑에 핀 연보랏빛 구절초꽃…

가지고 나간 양념거리와 곡식 값을 잘 받은 날은 새 양말 한켤레쯤 덤으로 달려오고, 수도 없이 입고 벗기를 반복하지만, 잠자리 머리맡에 곱게 개켜 둔 추석빔은 곧 만날 가족과 친지들의 도회지 냄새에 어울릴지 어떨지 설램도 짙어갑니다.
그 즈음엔 꼭 하루씩만 줄여드는 날짜가 굼뱅이 같습니다.

추석 이틀 혹은 하루 전, 서울을 출발한 가족들의 도착 시간을 가늠해 동구에 나온 마을 사람들의 얘깃소리는 줄 놓친 풍선처럼 하늘로 하늘로 부풀어 올라갑니다.

곱게 포장된 선물상자와 술병을 따로 든 뽀얀 얼굴의 가족들이 속속 도착하고, 반가운 상봉 뒤 어색한 서울 말투로 변한 서울 가족과의 머쓱함은 이내 호기심과 희망으로 바뀝니다.

온 가족 둘러앉아 햇곡식으로 빚은 송편과 바구니 가득 채운 사과, 배, 밤, 대추 등 풍성한 햇과일들도 기다림의 댓가인 듯 벙글거렸으니까요.

그러던 어느해 추석엔 기다리던 가족이 약속이나 한것 처럼 고향에 내려 갈 수 없다는 기별을 해옵니다. 그래도 취기어린 아버지의 호기로움에서 풍요를 체감하면, 도시의 가족들이 미리 보내 온 소포 꾸러미 속 때깔 고운 추석빔이나 특별한 학용품들로 재회의 포만감을 대신할 수있었습니다.

하지만 검푸른 하늘과 산봉우리들의 맵시나는 능선 위로 고추 잠자리떼 높이 날고, 고개 숙인 수수밭 가장자리의 키큰 해바라기와 코스모스의 한들림이 마냥 고요하고 적적하던 저물녘은 웬지 슬펐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그림자 선명하게 쨍하니 맑은 가을날 까닭모를 쓸쓸한 기분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맘에 대본 생각이지만, 아마도 그 시절 명화처럼 선명한 기다림의 잔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제 그 시절의 아쉬움도 설램도 아픔도 그저 빛바랜 사진처럼, 서쪽 산을 넘은 해를 따라 줄어들던 산그림자 처럼 문득 마음 어딘가를 가만히 스쳐갑니다. 흐르는 냇물처럼…

추석이 다가와도 우리 아이들에게는 제 어린 날의 무채색 동화같은 아릿한 기다림은 없을 겁니다. 대신 무섭게 변하는 세상의 신기루 같은 요지경의 신기가 대신하겠지… 짐작합니다.

어제 밤늦게 전남 고흥 섬마을 큰 시누님이 보낸 택배 박스를 받았습니다. 그 보물 상자를 자랑하려던 참인데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네요.

어젯밤 꿈길에 찾아오신 여든넷 나이 어린 시어머님이 제 마음 갈피를 흔들었습니다.
어머님이 리모델링 전 옛집 마루에 앉아 책을 보시는데 책장을 넘길 때마다 처음엔 책장이던 것이 가지, 호박, 감 이런 것들로 변해서 자꾸 떨어지는 거예요.
"어머니 그만 넘기세요. 다 떨어져요"했더니 "일없다. 이 책은 새로 부치면 된다"하시더니 이번엔 부억으로 들어가서 말린 생선이 가득 든 채반을 들고 나오시는데 애처럼 작아진 어머님이 어릴적 제옷을 입고 계셨어요.
어머님은 "이거 다 먹고 가라" 며 웃으시는데 저는 왠지 짠해서 울다 깼거든요.

잘해야 한해에 두어번 찾아뵙는데 올해는 남편과 큰아이만 따로 따로 갔다오고 저와 작은 애는 못갔습니다.

한 해에도 여러 차례, 어머님과 손위 시누님들은 남편의 어린 날을 기억하는 토종 음식들을 보냅니다. 그 음식들에는 남편의 어린 날도 깨소금과 참기름, 고춧가루와 김치 , 멸치와 김과 생선으로 스며들어 있다는 걸 발견한곤 합니다.

늘상 받아 먹던 음식들인데 이번엔 느낌이 좀 달랐습니다. 사적인 맘고생을 더한 탓이려니 하지만, 어머님을 뵈러갈 수 없는 상황탓인 듯 싶네요.

잘 여며진 꾸러미 속엔 충청도 댁인 제가 결혼 18년 동안 말 설고, 먹을 것 설은 시댁을 오가며 유독 즐기던 음식이 빼곡했습니다. 시댁이 있는 거금도 인근해산 반장게를 칼등으로 두들겨 간장 양념에 잰 짭쪼롭한 게장 한통, 찰밥과 맵고푸른 고추 갈아 넣은 무청 김치, 쪽파 김치, 서너근 분량의 돼지고기. 그 틈새를 가득 메운 풋고추… 가슴이 먹먹했지요.

올 추석도 어머님은 삼삼오오 웃음소리 흘리며 들고나는 이웃 식솔들을 부러워 하며, 행여하는 맘으로 수없이 동구로 나가실겁니다.
오지 않는 줄 알면서도 온종일 고모와 당숙들을 기다리던 어린 날 제 기다림의 멀미가 겹쳐집니다. "못 내려가겠어요" 쉽게 전화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님들, 추석이 닷새 앞이네요.
혹, 경기침체로 주름진 마음을 쭉 펼 수 있는 비법은 없을까요?
지칠고 힘들 때면 온기를 나눠주는 형제 자매 이웃 친지들께 "고맙습니다. 건강하시고, 즐거운 명절 즐기세요" 덕담 전화라도 돌리려고 합니다. "말의 힘"을 믿고 싶거든요.
그리고 훗날 아이들이 기억할 행복한 한 때를 선물하고, 어머님의 기다림을 채워드릴 뭔가를 궁리해야겠습니다.

애써 즐거운 맘 내봅니다.  - 느티나무 찻집 '감나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