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J가 달라졌다. 어둠이 열리면 낮고 메마른 J의 음성이 시작된다. 무심하게 줄거리를 놓치기도 했던 대화의 흐름이 달라졌다. J가 사귀던 남자와 헤어진지 육개월쯤 되었다. 애타도록 사랑했지만 결국 종말이 오고 만 것이다.

실연의 상처가 사랑한 깊이만큼 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담담하고 홀가분해했다. 서울근교 신도시 부근에 사는 J는 밤마다 나이트클럽을 다니며 마음을 치료받았다. J가 들려주는 나이트클럽에서 생긴 소위 ‘건수’라는 브리핑을 선입견 없이 듣는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삐뚤어져 가는 J의 불량함을 바른생활의 잣대로만 운운할 수 없었다.

J의 남자는 집착하다 못해 집요했다. 정신없이 의심하고 오해했다. J의 남편에게 “여자 단속 잘하라는” 협박까지 했다는 절규를 듣고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저에게도 아내가 있는 남자가 연인의 남편에게 그런 전화를 한 것이다.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고 말한 지 삼 년만의 일이었다.

사랑은 마음으로만 정이 드는 것이 아니라 육체끼리도 정이 든다고 했다. 그 정이 무섭다고 J는 말했다.

J는 삼 년 동안 어둠보다 짙은 눈을 감고 눈 먼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완전한 하나가 되지 못하는 현실을 남자가 더 견디지 못했다. 할인매장을 가든 사우나에 가든 남편보다 더 얽매인 애인에게 보고해야 했다.

이별이 싫어서 미혼남 미혼녀들은 결혼이라는 절차를 밟는다. 그러나 유부남 유부녀들은 결혼했다는 소속 때문에 만나고 만나도 서로의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무리 바꾸려 해도 당연한 가족과 쉽사리 헤어질 수는 없다.

사랑하는 애인이 자신의 가정을 도려내는 무모한 사람이라는 것을 J는 느끼기 시작했다. 변심을 눈치 챈 남자는 집요하게 괴롭히다 추한 사랑의 종지부를 찍어 주었다.

60~70년대 애정영화의 이별 설정은 상대의 행복을 위해 떠나준다. 사랑해도 떠나야하는 답답한 정경이었다. 내가 다치고 아팠던 만큼 너도 아파봐라는 비이성적인 사랑의 복수를 현대인들은 기꺼이 저지른다. ‘깨끗이 널 위해서라면…’ 긍정의 동사(動詞)가 아닌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라는 부정 동사(動詞)를 취한다.

후자의 경우가 된 부정동사를 취하는 사람을 사랑한 것도 J는 운명이라고 말했다. “내가 죄를 받고 있는 걸 꺼야” 몇 번을 울던 J에게 내 가슴을 빌려주고 싶었다. 내 것을 가져가서라도 덜 아파 보라고…. 

그런 J가 궁여지책 나이트클럽을 다니더니 새로운 애인을 사귄 것이다. 사람에 대한 염려가 도덕적이든 비도덕적이든 상대가 편하고 안정적인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새 애인은 모든 면에서 인간적이고 대화적인 사람이었다. ‘편안한 대화’는 다섯 글자에 불과했지만 그 느낌의 리듬이라는 것은 신체적 오감을 발기시키는 마력이 있었다.

사랑에 빠진 당사자들은 정작 대화는 뒷전이다. 트집잡고 오해하고 질투라는 애증만을 불태우려 한다. ‘사랑’이라는 온실 속에서 함부로 꽃을 꺾는다. 가시에 찔리고 꽃잎처럼 찢어지다 최후의 보루, 이별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렇게 진퇴양난을 거듭하다 다시 동맹을 맺는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은 다시는 너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J가 이제 사랑은 안하고 가정에만 열중할 줄 알았다. 나이트클럽에서 만나는 그렇고 그런 놀새들과 한동안만 기댈 줄 알았다. 그러나 J와 같은 여자가 바르게 살도록 화려한 네온은 현모양처를 용서하지 않는다.

초대형 나이트클럽은 주로 신도시 주변에서 성행하고 있다. J와 같은 프리 하고 외로움 많은 아줌마들을 기꺼이 유혹하는 성인클럽이다. 일산, 분당, 부천, 인천 쪽에 밀집해 있고 최근 수원에 새로 생긴 D나이트클럽은 무려 3,000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다. 100여 개의 룸이 하루 세 번 이상은 체인지 된다.

유흥업소들은 되도록 주택가 가까이 입주하려 한다. 한 집 걸려 모텔이 있고 술집이 있고 노래방이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쾌락적인 시설 투성이다. 거기에 세상적인 사람들이 가세해 불륜의 사랑은 언제나 파도처럼 무한하다.

그리고 언제나 접근이라는 우산을 들고 있는 것이 사랑이다. 하나의 성숙함만 달라져 있을 뿐 어느새 중간쯤에 가서 보면 그 감정의 혼탁함은 늘 똑같아져 있는 것을….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애욕의 본능 때문에 애인이라는 대리인을 수시로 도구 삼는 그런 되풀이는 조금은 씁쓸한 일이다.

J가 새 애인과 언제까지 가게 될까!! 사랑은 무죄이니 영원하기를 바라고 싶다. 어디에서 만났든 큐피드가 쏜 화살의 용도는 때와 장소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불륜’과 ‘부도덕한 바람’을 매도하다시피 냉정한 시선이다. 세상에 떳떳이 신고하지 못하는 내 곁의 내 사랑을 돌아보라?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베일이 벗겨져도 ‘사랑’을 부르짖을 용기 있는 사람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될까!!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당신은 진정한 사랑하노라고” 명명해도 될까!! 

봄이 온다. 사랑도 외로움도 봄이라면 다 견디고 싶은 계절이다. 내가 사랑하는 봄이라면 죽도록 사랑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에게 몸도 마음도 다 무너지고 싶다면 그런 느낌의 그를 새로운 내 애인으로 명명해도 될까!!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사랑할 대상은 눈에 띄지 않는다. 또 너만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남자의 말속에서 허구를 먼저 알아버린다. 그런 소질이 지나쳐 나는 쉽게 사랑에 빠지지 못한다. 그 사랑에게 운명을 걸지 못한다.

지금의 내 마음에 찍혀 있는 ‘이 사람이 나은 거야…’ 하면서도 나는 늘 세상에 나가 방황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