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으면 어떤 꽃으로 피어나고 싶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한 달이 지났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다. 부재를 잊었다가도 식탁을 차릴 때가 되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내 기억 속으로 들어오신다.

제일 큰 어른이었지만 제일 작은 아이가 되었다가 가신 할머니. 다섯 살 막내가 앉던 자리보다 더 많이 음식의 흔적은 남기시던 것도 돌아가시기 단 며칠 뿐이었다. 할머닌 그렇게 마지막까지도 나를 편하게 해주고 가시려 했다.

"내가 우리 막내 편하게 해주려고 아무거나 잘 먹는다. 음식 까탈부리면 우리 막내가 너무 힘들어지지" 하시면서 찬물에도 밥 한 그릇을 말끔히 드셨다.

처음 할머니를 만났을 때, 그때 나이는 여든이었다. 여자 나이 여든이면 세상 영욕은 다 흘러간 것이라 한다. 돈도 옷도 외모도 다 소용없는 것이라 한다.

남편이 없는 두 여자와 남편이 있는 한 여자가 한집에 살아갈 때 나는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행복해 해야 했다.

건조대에 널어진 빨래 개기는 할머니의 새벽 일거리였다. 아침이면 수북이 빨래가 개어져 있고, 난 이래 봬도 밥값을 했다는 표정으로 아침을 기다리셨다.

아이가 쪽쪽 빨아먹는 젖병을 잡아 주실 때면 나는 편안히 기저귀를 널거나 다른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여든의 가느다란 팔에서 토닥토닥 자장가도 불러 주었다. 평소에 아프다던 허리와 다리도 그 순간 만큼은 내색하지 않으셨다.

파를 다듬거나 손길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으면 얼른 뺏어다가 다듬으셨다.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음식 만들기가 있는 날이면 나와 할머니가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있었던 것이다.

뒤돌아보니… 할머니는 많은 일을 해주고 가신 건데 나는 가끔 할머니의 존재를 답답하고 성가시게 생각했던 것이다.

갑자기 방문이라도 열고 들어오면 난 어김없이 침대에 누워 텔레비젼을 보고 있거나 전화기를 들고 있을 때가 많았다. 할머닌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내 옷가지를 갠 빨래를 놓고 다시 나가셨다.

옛날 홀어머니와 외아들이 오순도순 살았다. 평화롭던 그 집에 며느리가 들어오면서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

시어머니는 서서히 며느리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아들을 빼앗긴 기분을 구박으로 화풀이 한 것이다. 일을 하러 나가고 단둘이 있을 때만 그랬기 때문에 아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어느 저녁, 밥의 뜸을 보느라 솥을 열어보는 며느리를 시어머니는 버릇없다며 사정없이 때렸다. 너무 매를 많이 맞은 며느리는 죽고 말았다. 뒤늦게 달려온 아들이 구슬피 울며 길가 솔밭에 아내를 묻어 주었다.

그 여름 며느리의 무덤가에는 밥알을 문 듯한 붉은 꽃이 피어났다. 착한 며느리가 밥알을 먹다 죽은 한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라며, 사람들은 그 꽃에게 '며느리 밥풀꽃' 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어머니는 시집살이 이야기를 곧잘 하셨다. 비가 축축이 온 거리를 적시거나 바람이 이리저리 제멋대로 부는 날이면 어머니 마음에도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나 보다.

할머니에게 고된 시집살이를 했다는 어머니는 밥풀꽃 이야기의 며느리처럼 되시진 않으셨다. 아마도 할머니에게도 질투라는 것이 할머니의 마음을 괴롭혀 어머니에게 화풀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도 외아들을 둔 홀어머니였으니까 …

어쩌면 어머니가 해 주시는 시집살이 이야기는 내게 애초부터 별 다른 효력이 없는 것이었다. 그때 뿐이었고 돌아서면 어머니의 이야기는 그 비와 바람 속으로 아랑곳없이 흘러갔다.

할머니의 병세는 갑자기 나빠지면서 진행을 계속했다. 처음엔 손수 씻으시다가 차츰 며느리와 손부의 손길이 가야 했다. 그러다 온전히 포기한 채 당신의 몸을 다 맡기셨다.

그러기를 몇 차례, 나는 할머니의 병간호가 길어지면 내 삶은 어떻게 되나 서서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나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던 것처럼.

어느 밤을 유난히 힘겹게 넘기신 할머니는 아침 나절 마지막 눈을 감으셨다. 내가 진짜 효부인지 시험도 해 봐야 했고, 지겨워서 도망가 버리고 싶은 못된 손부인지도 알아야 했는데 할머니는 행여 그런 맘조차 허락해 주지 않고 당신의 손을 흔드셨다.

치아가 모두 틀니로 되어 있는 할머니는 해체와 합체를 수시로 할 수 있는 편리한 슬픔 하나를 안고 살았다. 그 가짜 치아들은 조금 딱딱하거나 길이가 긴 음식을 거부해 할머니를 곤혹스럽게 했다.

젓가락이 가는 곳마다 가위를 들고 잘라 드려야 했다. 때론 내 마음이 가위처럼 사나워졌을까 봐 손목의 힘을 빼내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 내손에 할머니는 어느 날 팔찌 하나를 선물해 주셨다.

어디선가 금방 들릴 것만 같다.
"막내야, 우리 막내는 뭐든지 잘하지."

할머니의 무덤은 하염없이 빗물만 마시고 있겠지. 작은 언덕하나 가지시려 생전의 세월이 그렇게 길었던 것일까. 이 비가 그치면 할머니의 무덤에도 꽃이 피어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