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월드컵과 올림픽을 거치면서 이제 축구이야기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좋아하는 이야기가 됐습니다. 축구중계를 보기 위해 밤을 새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고 경기의 룰을 잘 모르더라도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풍경이 됐습니다.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축구야말로 규칙이 있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팀과 팀 간의 대항은 부족과 부족간의 싸움과도 같습니다. 국가대항전은 전쟁 그 자체입니다. 남자들은 마치 자신의 동료가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것처럼 열광을 하고 여자들은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을 전쟁터에 내보낸 사람처럼 가슴을 졸이며 응원을 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독일 영화 <베른의 기적>은 한국이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1954년 스위스 베른월드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독일의 어느 탄광촌에서 아버지 없이 자라난 마테스는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축구선수 란을 영웅처럼 떠받들고 있습니다. 마테스가 경기장에 오면 어김없이 골을 넣는 란은 마테스를 자신의 행운의 마스코트로 여깁니다.

마을에서 식당을 하는 어머니와 밴드에서 기타를 치는 형, 어머니의 가게에서 일을 돕는 누나, 그리고 어머니의 가게에서 담배꽁초를 말아서 파는 마테스, 이들 가족은 아버지가 없는 자리를 서로 메워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11년간 러시아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던 마테스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였지만 11년간의 포로수용소 생활로 인해 예전과 다르게 변한 아버지 때문에 화목했던 가정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란이 월드컵을 위해 마을을 떠난 사이 마테스는 포로수용소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변한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가출을 시도하고, 마테스의 형도 집을 떠납니다. 그리고 베른월드컵에 출전한 독일 팀은 힘겹게 본선에 진출하고 대망의 결승에 오르게 됩니다.

패전 이후 침체된 독일에 활기를 불어 넣어준 베른월드컵경기는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입니다. 본선진출만이라도 해주길 바랐던 우리 국가대표팀이 16강, 8강, 그리고 4강에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울고 웃으며 기뻐했던 지난 2002월드컵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 마테스네 가게에 모여 결승전을 보는 장면은 광화문 거리에 앉아 응원을 하던 지난 2002년 여름의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베른의 기적>은 단순한 스포츠 영화는 아닙니다. 마테스는 축구선수인 란을 영웅처럼 따르지만 단지 축구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란이 메워주길 바라는 마테스는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여전히 란이 더 가깝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런 마테스의 모습과 자신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가족들 때문에 마테스의 아버지는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충돌하게 됩니다.

예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독일 팀이 힘겹게 본선경기를 이겨나가는 동안 마테스의 아버지도 예전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자신의 힘들었던 포로수용소 생활을 마테스에게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를 들은 마테스의 가족은 아버지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덧붙이자면,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에 출전한 우리나라는 독일과 결승전에서 맞붙었던 헝가리에 9:0으로 패했습니다. 영화에도 아주 잠깐 뉴스의 멘트로 등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