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하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5월이었습니다. 그동안 기대했던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하고 칸 영화제에서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달이었습니다. 박찬 욱 감독의 <올드보이>와 홍상수 감독의<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칸 영화제에 출품됐고<올드보>는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두
영화가아니더라도 <효자동 이발사>, <아라한장풍대작전> 같은 재밌고 볼만한 영화들이 개봉한 것도 5월이었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영화들이 개봉됐지만 우리 영화에 눈길이 더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더군요.
<여자는
남자의미래다>는 홍상수 감독의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다섯 편의 작품으로 작가주의 감독으로 불리는 홍상수 감독, 매일 아침이면 그날 촬영분의 대본을 현장에서 완성시켜서 촬영을 하는 스타일은 이 영화를 찍을 때도 여전했다고 합니다.
일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보는 사람까지 부끄럽게 만들어 버리는 너무도 적나라한 현실의 묘사도 여전합니다.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고 그 둘이 섹스를, 그것도 너무도 현실적으로 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살아간다’라는 표현은 어쩌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홍상수 감독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건 정지된 순간에 더 가까우니까요.
이런 내용입니다. 대학 선후배인 두 남자가 있습니다. 선배는 사귀던 여자를 두고 유학길에 오릅니다. 여자는 기다리지만 남자는 연락을 끊습니다. 남자가 없는 빈자리를 남자의 후배가 기웃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후배와 여자는, 당연히 가까워집니다.
시간이 흐르고 선배는 촉망받는 예비영화감독이 되어 돌아오고 후배는 번듯한 집과 아내를 가진 유명한 대학의 강사가 되어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후배는 눈이 내리는 날 동네 중국집에서 고량주를 마시다말고 여자를 기억해냅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여자를 찾아갑니다.
그럴듯합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어쩌면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실제로 겪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홍상수 감독은 그 관계가 아니라 관계를 맺는 방법, 그러니까 섹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감독의 전작들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섹스는 남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섹스에 동참하고 있지만 모든 과정은 남자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주인공 선화(성현아)는 강압적인 선배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그런 선화를 깨끗하게 해준다며 헌준(김태우)역시 섹스를 합니다. 헌준의 빈자리 때문에 외로워하며 어깨를 기댄 선화에게 문호(유지태)가 바란 것 역시 섹스고, 결국 문호의 뜻대로 둘은 섹스를 하게 됩니다.
거기에다, 선화는 자신을 찾아 온 두 남자와 자기 집에서 번갈아가면서 섹스를 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불쌍한 짐승들에게 먹이를 나눠주는 것처럼.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침에 일어나 김치찌개를 맛있게 끓여주고 두 사람과 함께 약수터로 물을 뜨러 갑니다.
섹스를 손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 정도의 관계 맺는 방법으로 여긴다면 별로 문제될 건 없어 보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섹스를 한다면 말입니다. 그렇지만 홍상수 감독은 섹스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관계 맺기지만 이미 특별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모든 것은 남자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누구도 남자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선배에게 강제로 끌려갈 때의 선화도, 헌준이 여관으로 손을 잡아 끌 때의 선화역시, 방에서 옛 애인과 자고 나온 후에 거실에 있던 문호가 ‘빨아줘’라고 할 때의 선화도, 더러운 여인숙에서 ‘빨아드릴께요’라고 말하는 문호의 제자도. 그 어떤 여자도 남자들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감독이 여자를 보는 시선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언제나 남자들의 폭력에 순종적입니다. 자신을 창녀촌에 팔아넘겼던 깡패조차도 사랑하는 게 바로 김기덕 감독이 그린 여성상입니다. 남자들은 언제나 여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군림합니다. 관객들은 그런 김기덕 감독을 비난합니다.
그럼, 홍상수 감독이 그려내는 여자들은 어떤가요? 자유롭고 독립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남자들의 보조적인 존재, 혹은 대상이 아니었던가요? 속된 말로 ‘어떻게 한 번 자빠트리고 싶은’ 대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남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관객들은 왜 홍상수 감독에게는 김기덕 감독에게 쏘아대는 것 같은 비난을 하지 않는 것일까요?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발견>을 몇 번씩 보면서 생각했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춘천행 기차를 타고 소양호에 가면 혼자 쓸쓸이 서 있는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고 그 여자와 식사를 하다보면 술을 한잔하게 되고 어느 순간 같이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꼭 포항으로 가지 않더라도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어디선가 본 듯한 여자와 같이 앉게 되고 서울에 도착할 때쯤이면 자연스레 어깨에 손을 올릴 수 있는 사이가 되어 다시 식사, 술, 그리고 여관... 그렇지만 진정한 ‘생활’을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여행을 다녀보고 수많은 사람들의 옆자리에 앉아봤지만 그렇게 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현실을 현실보다도 세세하게 묘사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홍상수 감독이 그리는 현실 역시 ‘허구’입니다. 있을 법한 일이지만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는 그렇게 가시 돋친 비난을 퍼부으면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는 찬사를 보내는 걸까요?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보이는 폭력적인 남성상, 그리고 바보같이 당하면서도 순종하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여성상, 무언가 일그러진 시선 때문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어떻던가요? 오로지 앞에 있는 여자를 어떻게 한 번 자빠뜨릴 생각만 하는 속물 그 자체인 남자들, 그런 남자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들에게 몸을 허락하는 여자들, 너무도 세심하지만 오로지 섹스만을 향해 집중되어 있는 현실... 달라 보이지만 가만히 보면 비슷하지 않은가요?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아무리 폭력적이고 남성중심적이라지만 그 역시 그저 영화일 뿐입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어차피 현실이 아닌 허구입니다. 때론 현실의 어느 한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보이지 않던 곳까지 파헤치기도 합니다. 때론 숨기고 싶은 것들을 억지로 들춰내서 관객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때론 부끄러운 것들을 눈앞에 들이대면서 그걸 즐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무엇을 보여주든 영화는 허구입니다. 화성인이 지구를 침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7년 만에 만난 세 남녀가 섹스를 하는 것도 허구입니다. 그렇지만 관객은 홍상수 감독이 그려내는 허구는 현실, 그것도 자신들의 현실이라고 믿습니다. 그 믿음이 감독에게 향한 애정과 찬사가 됩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겁니다. 홍상수 감독이 그려내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은 지극히 조작된 허구라는 말, 누구나 한번쯤 꿈꾸었던, 그리고 겪었던 것처럼 생각되는 허구란 말입니다.
어차피, 영화는 영화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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