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천히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마음은 없었다. 갑자기 의식 저편에서 일어난 순간적인 충동이었다. 차를 세워 놓고 갈 것인지, 복잡한 은행 옆에 주차할 것인지 고민 아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좌회전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빨리 결정해야 했다. 그런데 멀지 않은 거리에 가야할 은행이 보였다. 나같이 조급한 사람이 있었는지 한 대의 차가 비상 깜박이를 켜놓았다.

나란히 세워놓고 불협화음이지만 깜박이 버튼도 눌러 놓았다. 달리는 차들 때문에 조수석으로 문을 열고 은행으로 뛰었다.

번호표의 대기 숫자는 열명이었고, 점심시간이다. 십분은 걸릴 것 같았다. 그 정도면 딱지를 붙여 놓거나 견인차가 끌어 갈 리는 없지만 일말의 불안감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어떤 아저씨가 번호표를 건네 주었다. 내 번호표보다 다섯 명이 줄어든 번호표였다. 인사라도 하려는데 벌써 사라졌다. '이런 것도 운 좋다고 할 수 있으려나' 다시 뛰었다.

차 안을 들여다 보니 열쇠는 그대로 매달려 있고 핸드폰은 의자에 떨어져 있었다. 힘이 주루룩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은 채 내 영혼은 잠시 치매에 걸린 듯 정지상태였다.

긴급출동 서비스를 불러야 한다고 머리에서 명령했다. 그러나 핸드폰은 차에 있고 번호의 앞자리도 뒷자리도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치킨 배달 집 보다 중국 집 번호보다 더 자주 애용하는 긴급출동 서비스 번호를 나는 이 순간 못 외우고 있었다.

천만다행 공중전화라도 발견한 것은 운 좋은 날의 행운이었다. 114에 걸어 보험회사 번호를 알아내 긴급출동을 요청했다.

한 통의 안부 전화를 하고 끊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저 멀리 총알 탄 사나이가 달려왔다. 그는 기다리던 시간보다 더 빨리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는 '감사합니다' 라는 내 말을 들었을까 싶게, 미안하게 인사하는 나를 보았을까 싶게, 쏜살같이 가벼렸다. 그가 켜놓은 비상 깜박이에서는 '나를 이젠 그만 부르세요'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운전을 시작한 후 열 번도 넘게 구조요청을 했다. 그때마다 다른 얼굴이 와 주어 한심한 내 얼굴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만약에 그가 계산서를 발행해 주며 얼마간의 출장비를 요구한다면 실수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겠지만, 공짜라면 소도 잡아 먹는다는 속담을 나는 사사로이 긴급출동 서비스에 써먹고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든지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는 화재보험 광고를 효과만점 누리고 있는 나였다.

어느 날 고객님의 긴급출동 서비스는 월간한도 내지는 연간한도를 초월했으니 더 이상 무료서비스 지원을 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떠할까! 나의 건망증을 고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햇살은 오후를 벗어나고 있다. 운전을 시작하고 지난 몇 년 동안 열쇠를 차에 꽂고 당황한 기억들이 환하게 떠오른다. 스테레오에서는 노래가 여전히 흘러 나온다. 아무 변함없는 이 공간으로 돌아오기위해 헐레벌떡한 순간들이 꿈인 것만 같다.

기억력이 감퇴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치매에 해당되고, 기억력 상실을 의식하는 것은 건망증이라고 한다. 특히 주부 건망증은 갱년기 전후에 더욱 심각해진다고 한다.

옷을 다리다가 전화벨이 울리면 다리미를 귀에 대고 '여보세요'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믿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오십년 가까이 살아오신 동네에서 집을 못 찾다니, 버스가 지나가는 반대로 걸어 오시라 해도 어머니는 모르겠다고만 했다. 꼼짝 말고 계시라 하고 차를 몰고 갔다.

어머니가 갑자기 며느리도 몰라보는 치매에 걸려 있을까봐 한없이 불안했다. 하지만 모자에 살짝 가려졌어도 발그레한 표정을 보며 집못찾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어머니는 '병'으로 인정해 주기를 원하셨지만…

잊고 싶은 기억은 되도록 빨리 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들도 몰라 보고 나조차도 누구인지 모르는 병에 이르는 망각은 비극일 것이다. 건망증과 치매를 이겨내는 방법은 '끊임없이 기억하라'고 한다.

지난날 사랑을 잊기 위해 내가 선택했던 것은 망각의 강에 빠져있는 것이었다. 깊은 강물 한가운데 그대로 가라앉은 채 침묵의 물살조차 거부했다. 흐르는 강물도 비켜가고 오직 살아서 흐른 것은 시간뿐이었다.

다시 사랑에 빠져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또 무정하게 이별이 찾아와도 사랑한 기억은 지우려 하지 말아야겠다. 그것은 곧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