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그녀는 장미꽃을 안고 있었다.
꽃과 사람이 어색해 보일만큼 그녀보다 꽃이 더 예뻤다. 화운데이션을 피부색보다 밝게 바른것을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하얀 얼굴에 빨간 입술이 유일하게 장미와 어울렸고, 키가 크다는 것 외에는 눈길을 끌만한 외모는 한 군데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늦은 밤 꽃을 들고 인사를 하러 왔다. 그녀가 결혼을 하면 어머니는 시고모가 되고 나와는 외사촌 동서 사이로 새로운 인연이 된다. 신랑은 아들 하나가 딸린 이혼남이었다. 거기에다 몇번의 병력을 가진 환자였다.

그런데 그녀는 처녀였다. 그래서 더욱 정상인으로 볼 수 없었다. 외모 어디에 흠이 있는지 슬금슬금 살펴 보았고, 보이지 않는 결점이라도 본 것처럼 우리는 입을 모아 성토했다.

두사람은 주위에서 보내는 낯선 시선과 의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정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첫대면을 장식했다. 사랑은 정말로 오묘한 섭리임을 둘에게서 깨달았다.

바람이 몸시 부는 겨울에 결혼을 했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거나 다름없는 남편과 또 그 남편의 자식까지, 그녀가 선택한 사랑이 압정같은 현실을 견디고 숭고하게 지켜질 수 있을 지 신부의 모습이 안개처럼 흐려져 왔다.

오랫동안 근심했던 자식이 여자를 만나고, 법적으로 깨끗한 처녀라는 것만으로도 시댁에서는 대환영이었다. 아이가 생겼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그녀가 나의 언니였다거나, 친구였다거나, 이웃집 아줌마였다면 불행한 삶을 살지 말라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아무리 사랑해서 만났다 해도 사랑은 환상이고 결혼은 현실이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랑은 환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을, 사랑은 늘 사람을 무지하게 만든다.

어느 날 만삭의 몸으로 그녀가 우리 집을 다니러 왔다. 돌이 지난 막내는 여전히 힘든 육아였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음 약한 나는 젖떼는 걸 실패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조카며느리를 기분전환하고 가라며 자꾸만 붙잡았다. 그녀도 애초부터 갈 맘이 없었던 사람처럼 주저앉았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업고 식성 좋은 산모를 위해 나는 한가지 반찬이라도 신경써야 했다.

외숙모는 미국에 가고 안 계셨다. 딸의 출산이 먼저라서 며느리 예정일에 맞춰 돌아오기로 하고 떠나셨다. 그리고 며느리는 첫 아이니 아무래도 예정일보다 좀 늦을 것을 계산하였으리라.

산모는 가끔씩 배를 만지며 표정이 굳어졌다. 어머니와 나는 이미 체험한 일이라 이상했지만 아직 남은 예정일만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머니와 함께 잤던 그녀가 더욱 수상했다. 화장실을 자주 드나들고, 어제보다 심하게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분명히 아이가 나오려는 통증이었다. 병원에 가야 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괜찮아" "조금 더 있다 가도 돼"

대답이 너무 침착하여 아이를 낳아 본 내가 처녀 같았다. 그래도 그녀의 판단을 믿기로 하고 아침을 준비했다.

어느새 우리 부부만 쓰는 화장실을 드나들고 있었다. 찜찜하고 미웠지만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화낼 수가 없었다. 이제는 화장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점점 불안해졌지만, 집에서 멀지 않는 곳에 병원이 있으니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때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아이 울음소리도 함께 들렸다. 놀란 나는 어머니에게 뛰어갔다.
화장실 문을 열어보니 타일 바닥에는 피가 괴여 있고, 산모는 탯줄이 대롱대롱 달린 아이를 힘겹게 안고 있었다. 스쳐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리를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어머니는 가위를 소독하라고 하셨다. 아이 다섯을 집에서 낳으셨으니 지금은 어머니를 믿어야 했다.

출산용품이 아무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아 급한 김에 막내가 쓰는 기저귀와 내복, 손수건도 다 꺼내 놓았다. 왜 그리 병원에 가지 않고 끝내 고집을 부려서 사고를 치고 말았는지 더 이상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내탓이오' 하면 편하더란 말처럼 체념 속에 슈퍼를 갔다. 미역을 사고 이것저것 산모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왔다.

어머니는 삼신 할머니가 고모네 집에서 아이를 낳게 했다며 아이의 별명을 뒷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바로 보내면 안 된다는 미신(?)때문에 삼일 후에 그녀는 집으로 갔다. 내게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2년이 흘렀다. 그 아이 뒷간이가 놀러왔다. 과부가 된 엄마손을 잡고… 제가 태어난 집에서 우리 아이들과 뛰어 놀고 있다. 태어난 집인 줄도 모르고 아빠가 있는지 없는지 부재라는 외로움도 모른다. 초롱한 눈망울이 예쁜 아이다.

화려한 장미는 그 꽃말처럼 정열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슬픔으로 이그러진 그녀가 다시 화운데이션을 바르고 장미빛 립스틱을 그리게 될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으로 건너간 사랑에게 미련이라는 의리를 지켜갈 수 있을까?

아직도 양반의 체통과 체면이 중요한 가문은 영원히 내 자식의 미망인으로 남기를 바라고 있다. 그녀가 그대로 있으면 열녀가 되고 도망이라도 가면 화냥년이 될 것이다. 둘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해서 간다 해도, 옳고 그른 것을 양반이라는 기준에서 재단하려 할 것이다.

재혼은 하느님도 용서했다. 혼자서 살아가기에는 그녀가 너무 젊다. 그 일로 지독하다고 미워했던 것을 기억에서 지우기로 한다. 그리고 용기를 주고 싶다. 사랑이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오거든 다시 해보라고. 그리고 내 마음은 솔직히 그녀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