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예감이 좋지 않아 달력을 봤다.
가슴이 철렁했다. 만약 또 아이를 가졌다면? 절대로 낳을수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첫째 둘째도 아닌 셋째를 낳는다는 건 보통 이상의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때는 늦둥이 바람이 일어 너도 나도 자랑삼아 셋째를 업고 다닐 때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사회의 분위기가 나은 시기였다.

그 이듬해 겨울의 시작은 추위만큼이나 시리게 다가왔다. 뉴스와 신문은 어두운 경제 현실을 걱정하며 괴로워했다. 조금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들어도 '나는 혹시 과소비자가 아닌가' 양심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현실에서 아이가 생겼다. 아예 셋째를 낳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터울을 많이 두고 늦둥이로 낳으려 했는데 뜻하지 않게 생긴것이다.

항상 임신과 더불어 오는 신호가 밤마다 꾸는 '꿈'이었다. 길을 가는데 거리에 온갖 보석이 가득했다. 정신없이 줍고 보니 모두 '금'이었다. 큰아이 둘째 아이와 전혀 다른 꿈이어서 딸을 가진 태몽이란 것을 의심치 않았다.

흔히 아들을 낳기 위해 애쓰고 괴로워하는데 나는 정반대로 딸을 원하고 있으니 세상이 공평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아이 둘을 키우면서 외로운 내 모습이 상상되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딸은 어려서부터 엄마를 생각하고, 시집을 가서도 엄마의 소중한 벗이 된다는데 세상의 절반인 여자를 나는 꼭 낳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남편도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나보다 더 딸을 원하고 있었다. 오로지 남편만의 열렬한 후원 속에 나의 용기는 점점 불러져 갔다.

그 무렵 많은 가정에 아이가 생겨 산부인과를 찾는 산모의 발걸음을 소개하며 '이상현상'이라고 매스컴은 보도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이 형제 자매가 많은 것은 굳이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농사일에 지친 탓도 있지만 전기가 없던 시절, 한 줄기 기름을 아끼기 위한, 긴 밤의 결과는 산아제한이 있을 때까지 무궁무진한 행진이었다.

지금 들추어 보는 그때와, 언제 어느 때 위기가 닥쳐올지 모르는 우리의 지금은 그 이유가 다르긴 하여도 방황을 끝내고 남편은 일찌감치 세상의 시름을 잠자리에 기대었으리라.

셋째를 가진 것을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딸에 대한 신념으로 아이를 꼭 낳아야겠다는 선언을 했다. 어머님은 놀라시기도 했지만 어린 둘째를 안타까워 하셨다. 딸은 시집 보내면 다 소용없다며 중얼거리셨다.

순간 어머니의 남아선호 사상이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보다 더 심하다는 것을 잊을 뻔했다. 당신은 아들을 다섯이나 낳으셨지만 딸에 대한 미련은 추호도 없으신 분이다. 그러나 나는 머지 않아 낳게 될 딸과 더불어 행복해지는 꿈을 꾸었다. 산모로서 겪어야 할 상황들이 즐겁게 넘어 갔다.

예쁜 과일만 골라 먹었다. 백화점 진열장의 마네킹 아이에게 입혀놓은 예쁜 옷을 구경하면서, 사내 아이 것은 코웃음을 치며 쳐다보지 않았다. 다시 겨울이 왔을 때는 나라의 경제 현실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나의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이웃 사람들은 두꺼운 옷으로 몸을 가리고 다니니 나에게서 어떤 변화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딸 손녀가 못마땅하신 어머니의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간혹 병원에 들러 아이의 건강을 확인하면서도 몇 번이고 묻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무거운 옷에 무거운 몸에 그럭저럭 힘겨운 겨울을 넘기고 나니 아이와 한 몸이 되어 맞이하는 계절도 마지막, 드디어 산뜻한 봄이 왔다. 이 봄 만큼만 예쁜 딸을 낳기를 간절히 바랬다. 옷차림이 가벼워지니 그제서야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몰라볼만큼 배가작았다. 그건 좀 셋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정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가까운 친척이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문상을 다니러 갈 상황이 일어났다. 셋째는 진통이 조짐만 있어도 와야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어머니가 떠나시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머니도 같은 마음이셨는지 대신 조카뻘 되는 분한테 부조금을 전해주러 가신다며 집을 나섰다.

늦은 밤 비는 오는데 어머니만 가시게 할 수 없어서 함께 나섰다. 택시를 타고 갔으면 하는데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하신 듯 "그냥 걷자 금방이다" 하시며 성큼 앞지르셨다. 끝없이 가고 오니 1시간 거리였다. 웬지 아랫배가 뻐근했다.

토요일이라고 남편은 어디로 가버리고 잠시 뻐근했던 아랫배가 신경이 쓰였지만 혼자서 잠을 청했다. 새벽 4시쯤 눈을 떳다. 뱃속의 아이가 자꾸만 신호를 보냈다. 예정일은 열흘정도 남았는데 간밤의 걸음이 무리였나 싶었다. 두 번을 경험했지만 세 번째 역시 겁이 나고 무서웠다.

옛날엔 아이 낳으러 들어가면서 섬돌 위의 신발 한 번 더 쳐다보고 들어간다는데, 아마도 다시 나와 저 신을 신을수 있을까 싶어서 이겠지! 남편은 어느 틈에 들어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래도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어머니였다. 늦게 들어온 아들을 좀더 자게 하시려는 듯 남편을 깨우려니 어머니가 말렸다. 비오는 새벽 아이를 낳기 위해 산부인과로 다시 걸었다.

그리고 1시간 30여 분 후 아이를 낳았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새벽을 울리게 했다. 성깔 있는 계집앤가 보다며 희미하게 웃었다.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계셨다. 그래도 손녀를 안고 보니 좋으신가 보구나!

그런데 어머니는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에미야 너는 아무래도 옛날에 태어났으면 씨받이 감이다." "내가 그 슬픈 씨받이 감이라니!" 아이의 울음소리, 어머니의 웃음소리 모두가 아득했다.

뒤늦게 달려온 남편이 셋째 아들을 바라보며 위로했다.
"당신이 예쁜 딸 예쁜 공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