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그 애인과 자주자주 데이트하지 못한다. 아무리 사랑해도 매일 만날 수는 없다. 며칠씩 간격을 두고 친해져야 한다.
‘그것을 마시면 잠이 오지 않아요’하면 조금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설마 그럴리가 하는 표정이지만 사실이었다. 어쩌다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혼자만의 촌티가 아님을 알게 되어 반가워진다.
이불 속에서 가만히 잠을 생각하면 곧바로 꿈속으로 빠져드는데, 열 두시가 다 되어도 도무지 잠은 오지 않고, 콩닥거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의 의미를 거슬려 올라가다 보면 그날은 내가 어김없이 커피를 마신 날이었다.
반대로 술을 마신 날 밤에는 더 없는 수면제로 누가 불면을 얘기했던갉 술은 언제나 나를 기다려준 애인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커피보다는 술 문화에 더 익숙해져 있었다. 차를 즐기는 가족보다는 술을 즐기는 가족의 모습을 더 많이 보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 하셨다. 엄마는 하루가 멀게 한숨을 쉬셨는데, 투명한 유리 항아리에 과일을 넣고 마시지 못하는 술을 가득 부어 놓으셨다. 그런 엄마의 취미가 어린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법이기도 했다.
술 마시는 남자하고는 연애도 하지 말라고 귀가 아프도록 말했는데, ‘그래도 남자라면 술 한잔 정도 마실 줄 알아야지’ 했는데 너무 좋아하는 남자를 만났다.
우리나라에 커피 문화가 시작된 지는 100년 전 민족의 가장 암울한 시기였던 일제시대부터였다.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에서 비슷한 시기에 들어 왔다.
최초로 커피를 마신 사람은 고종황제다. 1895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처음 마셔본 사람들은 이상한 서양국물이라하여 “양탕국”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그 시절 역관이었던 김흥륙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아침에 세도의 날개가 떨어지자 앙심을 품게 되었고, 덕수궁 주방에서 일하는 숙수를 매수하여 임금과 세자가 즐겨 마시던 커피에다 독을 넣게 하였다. 다행히 고종 임금은 입에 품었던 것을 뱉어내 괜찮았지만, 한 모금을 마셔 버린 세자는 그로 인해 유약체질의 원인이 되었다.
어느 집에 가보면 커피를 좋아하는 그 사람의 취향을 느낄 수 있다. 예쁜 커피잔이 몇 세트씩 장식되어 있고, 커피와 프림, 설탕을 담는 그릇도 한꺼번에 붙어 있어서 무척 실용적이고 편리해 보인다. 예쁘다는 느낌은 가지면서도 그렇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순전히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내 취향 탓이다.
반대로 예쁜 술잔을 보면 최면에 걸린 듯 스르르 술잔을 사고 만다. 맥주잔은 투명해야 하고, 소주잔은 투박해야 한다는 나만의 기호를 가지고 있다. 흐린 오후에 안개가 낀 듯한 맥주는 투명한 유리잔 속에 담겨 있어야 그 고독을 얼른 털어내고 싶다.
소주가 유리잔에 담겨 있으면 물 같은 느낌부터 싫어지고, 독한 맛과 쓴 느낌이 미리 상상되어 눈으로는 결코 마실 수 없다. 무채색을 혼합할 수 있는 유채색을 가능한한 원한다. 그런 곳에 담겨 있으면 소주의 양면성은 이미 저 밖으로 사라진다. 입술에 대는 순간 눈은 허락하고 마음은 터프한 술잔과 진한 키스를 원한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아주버니를 뵈러 간 적이 있었다. 청주 근교에 자리한 통나무집에 “기러기아빠”는 도예가 친구와 이웃하며 살았다. 그곳에서 도자기로 된 술잔을 보는 순간 아주버니를 졸라야 했다. 그것은 소주잔으로 더 없이 좋은 용도였다.
그렇게 술을 좋아했고 술은 깊은 잠을 자게 해 주었다. 그런데 그 술이 악마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실 때만 좋은 환각제 같은 것이고 다음 날이면 변함없는 불쾌함과 후회를 선물했다.
말과 행동의 변화는 돌이킬 수 없는 반성을 요구해 왔다. 이럴 바에는 불면이 두렵더라도 커피와 사귀어야 하지 않을까, 진지하게 애인에 대한 불만을 생각했다.
보통 커피 한 잔에는 50~90mg의 카페인이 들어있다. 최근의 보고서에는 커피가 신체반응 시간을 단축시키고 복잡한 업무수행 능력을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특히 수면 시간을 빼앗긴 상태에서 “인식기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성인 한 사람에게 적당한 카페인은 하루 100~200mg으로 커피 두 잔이나 세 잔 정도인데 그 이상을 마시면 카페인 중독을 의심해봐야 한다.
나는 한 잔만 마셔도 금세 반응이 오는 체질을 타고나서, 그 밤을 무리 없이 말똥거리며 지루한 상념을 거듭하고 만다.
월남 전쟁 때 있었던 커피에 얽힌 사연이 있었다. 어느 날 월남으로 떠난 아들에게서 편지와 선물이 배달되었는데 다름 아닌 커피였다. 그때만 해도 귀했던 커피였고 어쩌면 한 번도 구경해 본 적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간단한 설명서를 적어 보내지 않았던 것이 아들의 실수였다.
먼 나라에서 아들이 보내온 선물을 바라보며 가족들은 고심하기 시작했다. 겉포장부터가 해석할 수 없는 영어여서 신비로움을 더해 주었다. 마을을 들고 다니며 물어봐도 그 용도와 쓰임을 알아낼 수 없었다.
가족들은 결론을 내렸다. 틀림없이 몸에 좋은 보약일 거라며 넓은 가마솥에 커피를 쏟아 부었다.
정성껏 다린 것은 물론이고, 엑기스처럼 농도가 짙어진 커피는 가족의 수만큼 돌아갈 수 있도록 다려졌다. 그리고 한약을 마시듯 홀딱 비운 그 날, 불면의 밤을 새우며 속삭였다고 한다.
“정신이 말똥말똥한 걸 보니, 좋은 약은 역시 다르구나.”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작은 일도 가볍게 여겨지지 않고 내면 깊숙이 빠져 들어간다. 헤어나기 어려우리만치 방황을 하다 별 수 없이 생활 속으로 돌아온다. 고독함이, 외로움이, 그리움이 다가오려 할 때마다 나를 기다리는 너에게 달려갔다. 한 잔 한 잔 넘어갈 때마다 목은 쓰려오고 진저리 치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잠시 전의 내가 아니었다.
그렇게 의지했던 내 애인과 이별을 하려 한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후회하지 않을까.’ 헤어질 애인에 대한 미련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조금씩 길들여져 가는 커피와 사귀며, 멀어지는 “인식기능”으로부터 내 영혼을 되돌려 놓고 싶다.
그 습관과 향기에 중독되어 버린다 해도, 숱한 불면의 밤이 지루해진다 해도, 견뎌 가는 것은 새로 사귄 애인에 대한 즐거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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