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은 천년을 하루같이 흙과 함께 한 삶 속에서 태생된 애환이 농축된 農者의 마음이다. 그 농업이 이제는 첨단산업에 밀려 점점 피폐해가고 농경사회의 정신적 지주요 평화의 상징이었던 순박한 농심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농심을 잃어 가면서 인간은 조급증에 걸렸고 여유와 평화를 잃어 가고 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자주 농장에 따라 다닌 적이 있다. 그러나 꾀를 부려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지만 그 농촌의 낭만은 잊을 수 없다. 때때로 후미진 언덕의 풀섶에 누워 마냥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며 구름으로 소를 만들기도 하고 닭을 만들기도 하며, 멀리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도회지로 가는 꿈을 꾸었다. 그때부터 나는 돈을 많이 벌어서 이 고향 땅에 대지주가 되는 꿈을 키워갔다. 

'꿈은 이루어지는 것인가?' 드디어 그 십대 소년시절을 마지막으로 꿈을 이루기 위하여 고향의 삶은 접어야 했다. 세상은 나를 치열한 경쟁의 대열 속에 섞이게 했고, 그래서 그 고향의 순수한 농심을 세풍(世風)에 하나 하나 잃어 갔다.

나는 반세기의 긴긴 세월을 타향생활로 전전하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어릴 때 잊혀진 농심을 아쉬워하며 가슴 저리게 고향의 추억을 되씹어 본다. 성이 다르고 피가 섞이지 않아도 한 형제요 자매처럼 지냈었고 길흉대사는 개인이나 집안의 행사가 아니라 온 동네가 함께 하는 축제였으며 농사는 거의가 품앗이로 끈끈한 형제애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흙이 베푼 은총이었다.

“암탉이 알을 품어 새끼를 부화하듯 모든 씨를 체온으로 품어 싹 돋게 하는 너는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어머니며 나의 껍질이었구나!'

너무나 심하게 아파서 죽기 바로 직전인 상태에 이르면 알부민주사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너라는 것을 알았다. 오염 되지 않는 숫처녀 같은 너에게 납짝 엎드려 네가 지닌 왕성한 기운을 가득 빨아들이며 님의 입술을 애무하듯이 긴 입맞춤을 하고 나면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듯 몸에 생기가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단다. 오 사랑스런 흙이여! (소담의 `흙의 매력`)

흙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농자는 농토를 삶의 도구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흙을 인간의 몽학(蒙學) 선생으로 생각한다. 흙은 정직해서 뿌린 것을 거두고 사랑하는 것만큼 열매를 준다. 과학의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을 창조할 수는 없지만 흙은 끊임없이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보듬어 준다. 그래서 흙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생명의 근원인 흙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고 또한 삶의 동반자로 생각했다.

농심은 시절을 따라 씨뿌리는 봄과 무성하게 가꾸는 여름과 풍성하게 거두는 가을을 통해 뿌릴 때가 있고 가꿀 때가 있으며 거둘 때가 있다는 질서를 알고 있다. 인간이 아무리 요구하고 필요로 해도 한해에 봄을 두 번 맞이할 수 없고 두 번의 수확을 거둘 수 없으며 시절에 따라 편승하고 준비하고 기다리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인내와 기다림의 미덕을 키워야 했고 한해(旱害)와 수해(水害)로 농사를 망쳐 그 슬픔과 고통을 누르면서도 하늘에 대한 원망만은 조심스러워 해야 했다. 인간의 의지로는 결코 움직일 수 없는 대자연의 법칙을 두려워하고 순응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반세기의 타향살이에서도 대농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내 고향 닮은 이곳 김포 펄에 겨우 몇 백평의 땅을 소유하고 황혼의 여장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내 소유의 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기뻤는지 모른다.

나는 열심히 그 땅에서 조상이 뿌렸던 씨를 뿌리고 가꾸면서 "여보, 우리는 이제 농부가 다 되었소"라고 말한다. "뭐라고요?... 이 농토 가지고 어떻게 농부란 말이에요?" 아내는 내게 다그쳐 묻는다. 그러나 이렇게 대답한다. "농부란 땅의 크기로 가름되는 게 아니요. 땅한 평 없어도 농부일 수 있으며, 땅이 아무리 많아도 농부가 아닐 수 있어요. 농부란, 흙을 얼마나 사랑하며 그 소산(所産)을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는가 하는 농심으로 가름하고 싶어요."

인간은 흙을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 생명을 산출하는 흙을 경영해야 인간의 가치와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게 될 것이다. 지금은 신의 영역에 도전할 정도로 과학의 첨단을 걷고 있지만 인간은 결국 스스로 만든 것에 올무가 되어 그 속에 갇히고 부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흙은 정말 정직하고 거짓이 없다. 심은 대로 거둔다. 생명의 근원에 뿌리를 내리고  생명의 고귀함과 모든 생물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자연을 두려워하고 그 질서에 순종할 때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