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철호 청석학원 원장

에릭 시걸의 소설 『러브스토리』가 영화화되어 지구를 한 바퀴를 돌 만큼의 흥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 “사랑은 미안해하는 것이 아니야(Love means never have to say you’re sorry)”란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신 죽어 주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사 같습니다.

젊은 시절 연애 감정에 충실하던 시절은 세상 모든 것을 서로를 위해 떠안아 줄 정도이고 목숨을 나눌 것 같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자질구레한 일로 미안하단 말을 하는 것이 하늘같은 사랑을 사소한 일로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이 군더더기처럼 느껴 졌습니다.

하지만 사랑도 세월에 따라 변하고 우선 사랑의 상대가 변하고, 주변의 환경과 조건이 끝없이 변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분은 ‘사랑한다’란 말 앞에는 ‘영원히’란 말이 생략된 말이라고 합니다. ‘사랑한다’란 말은 미래를 향한 바램이고 이상입니다. 대신 한정된 시간을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영원히’라는 말은 결국 성립할 수 없는 말인 것입니다.

얼마 전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매일 운동하는 아파트 소공원을 걷고 있었습니다. 늦은 시간이라 운동하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평소와 같이 나란히 걷고 있었습니다. 마눌님은 제 오른 쪽에서 걷고 있었습니다.

다른 날과 달리 마눌님이 평소에 안 하던 모습을 보입니다. 제 손을 정답게 꽉 쥐면서 제 얼굴을 쳐다 보며 말합니다.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데, 맞춰 보세요” 무슨 일일까 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알 수가 없었습니다. 웃으며 말을 꺼내는데, 정말 좋은 일이 있었는데 제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부부의 유일한 부동산인 아파트의 국민은행 대출금이 끝났으니, 근저당 설정 해제를 위해 내일 오전에 은행에 가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벌써 십년 전에 다 갚았어야 할 빚이 이제 끝난 겁니다. 매달 70-80만 원 씩 나가던 할부금이 다음 달부터 통장에 저축으로 쌓일 것이니 정말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월 초에 할부금이 걱정이 되는 달엔 늘 그 걱정은 마눌님 몫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끝났어야 할 은행 빚은 순전하게 제 탓이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시의원에 출마하면서 저축한 돈을 다 끌어 쓰고도 모자라서 집을 담보로 추가로 대출을 받아서 선거비용을 쓰면서 대출금이 늘어났습니다. 상환 기간이 십 년 더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정색을 하고 마눌님의 손을 잡은 채, 부끄럽고 어색한 마음으로 시선은 걷는 방향으로 향한 채 “미안해요, 당신이 수고가 많았어요”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말을 마치자 그림자처럼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거야’라는 말이 따라 왔습니다. 그 많은 날의 경제적 어려움과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배려해 준 마눌님의 그 마음이 그날 올려다 본 하늘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기네스북에 80년간의 최장수 부부로 기록된 영국의 애로 스미스 부부는 행복한 금실의 비결로 서로에게 늘 ‘미안해’라고 말하는 대화 습관을 꼽았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또는 부모가 자식에게 ‘미안해’라고 말할 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보다 더 큰 회복과 치유가 일어납니다.

‘미안해요’란 말은 때가 늦으면 빛이 바래는 말입니다. 더 늦어서 안되는 것은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미안해’라는 말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배려하고 뒤돌아 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성찰이 떠 오를 때마다 ‘마안하다’란 말이 떠 오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