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철호 청석학원 원장

타인이 내게 내어주는 시간은 언제나 소중한 선물이다. 지금은 나미브 사막의 폭풍우처럼 희소해졌지만 누군가에게 한 시간 혹은 하루 동안 온전히 집중하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다 –토마스 힐란드 에릭센 -

십여 년 전 어느 때의 일입니다. 나는 매일 매일이 해야 할 일들로 빼꼼하게 적힌 일정표를 봐 가면서 생활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동네 병원에서 매년하는 정기검진을 받았습니다. 내 위의 형님들 중에 세 분이나 전립선 암으로 고생을 하셔서 매년 정기검진 때마다 별도의 PSA검사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검사는 지수가 3-4 이하가 정상이라고 하는데 매년 정상이던 수치가 그해에는 29가 나왔습니다. 의사의 권유에 따라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여러 조사를 거쳐 전립선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건강보험공단에 암환자 등록을 하고 병원을 나서면서 착잡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대단치 않은 병이고 치료가 되는 병이지만 모든 일을 멈춰야 하는 것이라 귀찮은 생각으로 짜증이 났습니다.

치료 방법이 여러 가지라서 여기 저기 수소문하고, 인테넷을 검색하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 분당의 모 병원에서 이틀 정도 입원하는 시술을 받았습니다. 시술 후 일주일에 한 두 번 씩 김포에서 분당으로 통원치료를 받았습니다. 하던 일을 모두 정지한 상태라서 일상의 궤도 이탈을 경험하면서 색다른 시간들이 찾아 왔습니다. 삶의 계획이나 일정이 물거품처럼 꺼져가며 삶의 실체가 사라져감을 느끼ㅌ는 시간이었습니다.

과천 근처를 지나면서 보고 싶은 친구를 생각해 냈습니다. 가끔 연락은 했지만 못 만난 지 십년 쯤 된 친구였습니다. 왜 그가 보고 싶었는지는 제 자신이 잘 압니다. 그 친구에게서 갑자기 내게 닥친 불행을 위로 받고 싶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론 그 친구라면 내가 원하는 진정성있는 위로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린 고등학교 3년 중 2년을 한 이불을 덥고 지냈던 사이였습니다. 그 친구가 내 방에서 하숙을 하게 된 것입니다. 호기심 많고, 비밀도 많던 그 시절을 밤마다 쏙닥거리며 지냈습니다. 그 당시 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은 졸업 시기에 고졸 대상 은행신입사원으로 취직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한 해 졸업생 4백여명 중 2백명 정도가 시중 은행에 취업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그 친구는 저에 비해서 성실하고 노력형이라 어머니는 그 친구를 닮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친구는 제 연애편지를 먼저 읽고 알 수도 없던 그 연애의 세계를 코치하곤 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던 그 친구에 비해 늘 한눈팔기를 좋아하던 저는 은행 시험에도 떨어지고, 일년 노력해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 친구는 농협에 합격해서 평생을 근무하고 농협 지점장으로 정년퇴직해서 지금은 과천의 어느 빌딩의 관리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4월 중순 경에 분당 병원으로 정기검진을 받으러 가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찾아 갔습니다. 4층 상가건물 관리소장이라며, 건물 상가번영회에서 자기가 그만 둘까 모두 걱정들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막상 찾아간 그의 사무실은 생각했던 것 보다 초라했습니다. 계단 아래 구석진 곳에 한평 반 남짓한 구석진 공간에 문을 달고 책상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직원은 초로의 할머니 한 분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건물 관리소장을 하기 위해 보일러 기술에다 전기 기사 자격까지 땄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는 체면이나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자기 세계 속에 여전히 완고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옥상에는 그가 관리하는 닭장과 토끼 사육장을 보여주며 그가 즐겁게 살고 있노라며 자랑을 했습니다. 고교시절이나 나이든 지금이나 항상 긍정적이고 세상에 대해 태연한 그 모습이 제게는 큰 울림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날 전 내게 온 병이 내게 온 휴식의 시간에 불과하다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날 우리는 봄꽃 구경을 하면서 서울 대공원을 산책했습니다. 점심은 허름한 비닐하우스로 된 무허가 식당에서 1인당 5천원하는 한정식으로 점심을 했습니다. 얼마나 맛있던지 지금도 그 맛을 기억합니다. 며칠 전에도 통화를 하면서도 그 식당 이야기를 했습니다.

삶의 기쁨을 느끼는 지점들은 의외로 사소하고 단순한 일들에서 일어납니다. 그날 우리는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공원 벤치에 앉아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병들고 삶에 지쳐 남루하고 우울했던 내 삶을 진정으로 응원해주고 잘 살아왔다며 칭찬해주었습니다. 세상의 그 누구를 만나는 것 보다 진솔하게 대화하며 그에게 기댔던 그날의 그 시간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세상의 강을 건너가는 버팀목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은 잊을 수 없는 봄날의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