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철호 청석학원 원장

순간의 소중함은 그것이 추억이 되기 전까진 절대 알 수 없다.
– 닥터 수스(Dr. Seuss) –

“호수의 물을 마셔보겠습니까?” 고대 그리스 민족이 만들어 낸 희랍 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호수, 레테 호수 이야기에 나오는 한 부분입니다.

한 여인이 레테 호수를 건너려던 때 뱃사공이 “호수의 물을 마시고 건너지 않겠냐!”고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여인은 궁금해서 뱃사공에게 말했습니다.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지요?"

그러자 뱃사공이 다시 말했습니다. "지난날의 괴로웠던 일들을 모두 잊게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명심할 것이 있는데 지난날의 기쁜 추억도 모두 함께 잊힌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습니다. "그럼 물을 마시지 않겠어요."

희로애락이 뒤섞인 인생 속에는 슬픔과 괴로움의 기억과 기쁨과 사랑의 기억이 함께 공존합니다. 기쁨과 사랑의 무게는 슬픔과 괴로움의 무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기쁨과 사랑 기억은 위기를 견디고 버티는 큰 힘이 됩니다.

추억이란 과거의 지갑 속에 든 금화와 같은 것입니다. 꺼내서 느껴보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쩌면 내게 왔던 시간의 상처에 돋아난 새살 같은 새로운 시간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아침잠이 없어졌습니다. 일어나 세수를 하려고 욕실의 거울 앞에 서서 물끄러미 거울 속의 ‘나’를 바라 봅니다. ‘나’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직관하게 됩니다.

‘나’라는 실체는 내가 ‘나’를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주 추운 겨울날엔 가끔씩 초등학교 어린 시절, 시냇가에서 형들과 썰매타고 놀던 유구천의 풍경이 떠 오릅니다. 물이 얼마나 맑던지 가장자리 쪽엔 작은 물고기들이 몰려 다니는 모습이 물 밖에서도 보였습니다.

봄이면 그 어느 산 모퉁이에선 낚시를 좋아하던 셋째 형이 수수깡으로 만든 찌를 달아 붕어를 잡았습니다. 난 붕어를 잡을 때마다 대나무로 만든 고기 바구니에 담아가며 고기가 몇 마리인지 연시 세다가 뒷산 그림자가 산 모퉁이를 덥을 때쯤엔 시들해져서 집에 가자며 형을 졸랐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가끔 꺼내 보는 그 액자의 그림같은 추억 속의 사진도 해마다 다르게 느껴집니다. 지난 시간이 달라진다는 것이 좀 이상한데 생각해보니 그것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나’가 계속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삶이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시작되어 중간에 끊어지는 연줄 마냥 공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나’도 변하고 내가 기억하는 추억도 변하는 것이 마치 태양을 돌면서 자전하는 지구와 태양계가 끝업시 우주 공간으로 다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월이 더 흐르면 아침에 일어나 문득 거울 속의 ‘나’를 잃어버리는 것도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