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비에 가리고 뿌연 안개 빛 코팅용지로도 가려져 있다.
유월의 비는 거침없이 대지를 두드린다. 수제비 모양의 무늬 잔치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 강물을 따라 집으로 간다. 비오는 날은 스며드는 습기 만큼이나 체온도 떨어지는 걸까, 냉장고에서 꺼낸 차디찬 얼음 같은 음습한 한기가 다리를 저리게 한다.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 방송국에 들어가 음악의 볼륨을 높였다.
이대로 끌어안고 잘 수 없는 고독이라면 음악에라도 깊숙이 침수시켜야 했다. 메일함 편지읽기에는 몇 통이라고 새겨져 있다. 기다리는 메일은 하나 없고 광고업체의 요란한 스팸 투성이다. 메일 차단기능에 등록해 놓아도 다시 오는 정성에 이제는 지치고 짜증이 난다.

휴지통 비우기를 했다.
이동한 메일들은 휴지통에 잠적해 있다가, 자칫하면 용량 초과라는 과부하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메일이 허공에서 맴돌다 돌아가지 못하도록 청소를 한다. 준비를 해도 오지 않는 기다림의 연속이지만…

즐겨찾기를 지나가다 눈길이 머무는 곳에 마우스를 정지시켰다.
"함께 하면 즐거운 사람들" 한때 내가 정신적인 방황을 저당해 둔 사이트였다. 어느 여름 날, 자욱한 안개 봉우리를 넘어오던 기억 쯤 이랄까! 몇 번의 하얀 밤이 지나갔었는지, 그 밤 내내 몇 번의 빗물이 어둠을 씻어 주었는지 정지된 기억이 재생 버튼을 누른다.

나의 방에 컴퓨터가 들어 오던 날은 늦은 햇살이 석양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린이 프로에서부터 애국가가 뭉클하니 울릴 때까지, 신 눈물이 뺨 한 칸에 흐르도록 즐겨보던 TV는 이제 안녕이었다. 거실에 두고 대외용으로 쓰자던 의견도 물리치고 침대 옆 내친구로 모셔 오기를 성공했다.

Y는 제3의 인물이다.
그의 애기를 들려 주는 사람 때문에 낯익은 화제의 주인공으로 어느 사이 친근감마저 느껴지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남편의 잦은 외박으로 어느 날부터 시작한 채팅은 Y의 삶에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채팅 중독에 빠진 Y가 도덕적인 결함에는 부딪치지만, 가정주부로 시작하여 사회면의 굵직한 기사감이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졌다. 그런 Y의 이야기가 내겐 어떤 색깔로 각인되었었기엡

컴퓨터가 내 방으로 들어오던 날, 그 작업은 남편도 모르게 이루어졌다.
채팅클럽에 회원가입 등록을 마쳐 놓고 어둠을 기다렸다. 해도 둥둥 떠있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했다. 어떤 범죄심리가 가슴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초조하게 밤을 기다렸다.

그 날 도마 위에서 채썰기라도 했더라면 야채와 칼끝 사이의 간격이 평소 두 배쯤 넓게 썰었을 것이고, 또 계란말이라도 했더라면 속까지 잘 익혀야 하는데, 가스레인지의 온도 조절도 생략하며 물컹한 속살을 엎고 뒤집고 했으리라.

늘 기다렸다가 식사를 하던 가족들의 의아하다는 합창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학습지 체크를 할 때는 대충대충한 표시라도 날까 봐 빨간색으로 힘주어 동그라미를 쳐 주었다.

해는 점점 그 빛이 처연해져 갔다. 밤은 느리게 오고 내 마음만 조급하게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왜, 이런 날만 계속되어야 해?" 너무 행복해서 삶의 부르조아가 생긴 거라고… 쓸데없는 생각을 잊는데는 청소가 제일이라며 아내의 권태를 퉁명스럽게 밀어내던 남편의 모습이 스쳐갔다.

그러나 곧 클럽에 입장했다. 우선 스릴감이 있었다. 미팅을 나갈때는 의상과 화장과 신경써야 할 부분이 머리에서 발끝까지인데, 편하게도 이 클럽은 눈과 손만 필요하다.

왕초보인 내가 준비한 것이라곤, 간단한 사전 지식 몇 가지였다.

첫째, 이름 공개는 절대 하지 말 것(아는 사람과 만날 수 있으므로)
둘째, 대답은 짧게 할 것(채팅 용어를 모르면 왕초보 티가 들통날 수 있으므로)
셋째, 깊이 빠지지 말 것(문자는 즉시 뇌를 자극하므로)
십계명에서도 지키기 힘든 계명이 한 두개가 있듯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세 번째였다.
두 가지는 어렵지 않았지만 한가지가 어려움일 것 같았다. 수많은 채팅족들이 물의를 일으키는 화근도 빠져 나오지 못해서가 아니었을까.

그 남친<남자친구>은 허브향기를 좋아한다며 프로포즈를 해왔다.

바람돌이: 하이!!
바람돌이: !!!
바람돌이: 방가요~^^*
은빛안개: 네, 저두요
바람돌이: 저는 설인데요 님(은빛안개님)은 어디세요?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말로 인한 상처가 없는 침묵의 언어는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오고 그 밤, 어둠의 먹칠이 끝날 때까지 대화에 열중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몽롱한 영혼은 눈을 비비고 내 인생의 카운셀러라는 합법적인 끈을 당겨 접속을 시도하고 있었다.

인간으로 환생하여 여덟 명의 선녀와 부귀영화를 누리다 깨어보니 꿈이더라는 구운몽의 주인공 성진(性眞)이 보낸 시간쯤이었으리라. 바람돌이는 서서히 별명답게 대화의 본색을 드러내 저속하게 변해갔다. 그의 의도도 별 수 없이 그렇고 그런 세상적이었다.

이쯤에서 끝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몇 번이고 공개하고 싶었던 이름과 얼굴이 갑자기 소중해졌다. 바람돌이를 깨끗이 바람 맞히던 날은 한 줄기 아픔 따위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수선한 방과 먼지를 닦으며 다시 일상의 나로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잡기에는 취약하다. 고스톱이건 오락이건 가족 잔치에 떠밀려 어쩌다 한 번 끼어들었지만, 하고 싶은 마음에 못 견디는 일은 일어 나지 않았다.

회원 탈퇴를 하고 채팅클럽에서 자랑스럽게 명예 퇴장을 했다.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반성하며.

언젠가 여름 휴가를 마치고 설악산 미시령을 넘어올 때였다. 한 치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안개가 멋이 아닌 공포로 다가왔다. 꼬불꼬불한 산허리를 돌고 돌아 어느 평지에서 찾아 낸 환한 햇살은 잊을 수 없는 환희였다.

아직도 불안한 안개 속에서 채팅에 빠진 영혼들에게 그때 느낀 광명(光明)을 전해줄 수 있다면… 지금도 비는 내리고 참으려고 애쓰던 우울함이 씻어지지 않는다. 물에 젖은 창호지 같은 마음이 유난히 시린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