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5년 8월 20일 중국 길림성에 있는 도문시를 방문한 일이 있다. 시간의 여유가
있고 해서 두만강가를 산책하면서 깊은 상념에 잠겨보기도 했다. 일제시대 우리 동족들이 가난에 찌들려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이 강물을 건넜던
일을 생각하며 “눈물 젖은 두만강”을 혼자 속삭이듯 불러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독립투사들이 말을 타고 이 강둑을 달리며 조국의 광복을 다짐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시울을 적신 일이
있다. 강 건너편에는 북한 인민군이 2~300m의 간격으로 완전 무장을 하고 국경선을 지키고 있었으며 멀리 보이는 마을 어귀에는 소 달구지가
다니고 있었다. 해방 이후 60년 동안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상대적으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 쪽 도문시는 현대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어 민족적 자존심 때문에 우울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멀리
북한쪽 산자락에는 선전표어가 큰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김일성 동지 뜻 이어받아 남북통일 이룩하자”이다. 그가 48년 동안 북한을 통치했지만
남긴 것은 이 허무맹랑한 구호와 가난과 부자유, 그것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오고
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김일성 주석을 찬양하는 구호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그래서 김일성은 여기저기 사람들의 발끝이 닿는 곳곳마다 그 이름을 선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물가운데 이름을 중시하는 동물은 인간밖에는 없다. 두만강가에 있는 공중화장실, 지저분하기로 말하면 세계에서 제일로 손꼽힐
것으로 생각되는 그 흉한 화장실 벽에도 한국인들로 추정되는 이름들이 군데군데 낙서돼 있었다. 잘못된 공명심(功名心)의 발로이다. 여기저기에 자기
이름이 게재되고 자기 얼굴이 드러나기를 좋아하는 습성 그것도 잘못된 공명심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빗나간 공명심 그것은 결국 자기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다.
혹자는 인간은 죽어서 유전자를 남긴다고 했다. 어찌 인간뿐이겠는가. 동식물도 자기 유전자를 남기기 위하여 필사적이다. 인간의 몸 안에 있는
세포 수는 100조를 넘는다고 한다. 이 세포 안에 들어있는 DNA는 정자 속에 담겨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리차드 도킨스에 의하면 인간은
DNA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하고 그의 지령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모든 생명체를 “생존기계”라고 했다. 이같은 관점에서 보면
인간 생명의 역사는 DNA의 역사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유전자를 전파하려고 하는 것인지 모른다.
최근 부녀자 82명을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된 이모(45)씨 역시 DNA 지문분석을 통해서 경찰에 꼬리가 잡히게 되었다. 어쩌면 그도 자기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한 방법으로 수많은 부녀자들을 성폭행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화장실 벽에 자기 이름을 새겨놓는 행위나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남겨야 하나?
인간은 살아서 문화를 남긴다. 문화, 그것은 창조적 DNA를 가진 인간 고유의 유산이라고 할 것이다. 모든 동물은 본능으로 살아가고 있다.
IQ가 인간과 비슷하다는 원숭이도 태고 이래 변한 것이 없다. 원숭이가 만든 문화재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 문명의 발전은 끊이질
않는다. 20세기 초에 비행기가 만들어지더니 100년이 못가 로켓트를 타고 우주를 여행하게 되었다. 인간만이 가진 창조적 DNA덕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것도 인간밖에는 없다.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이라는 힘의 논리가 질서를 유지해 가고 있지만 인간
세계는 도덕성과 종교성이 조화를 이루어 인간만의 질서를 유지해 가고 있다. 이 질서가 곧 문화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고 무엇을 입고
어떤 집을 짓고 사느냐가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의식하고 그것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모든 것이 문화다. 이 문화를 발전시켜 다음
세대에 남겨주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죽고 난 후에는 역사를 남긴다.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헤르도토스는 기원전 484년에 지금의 터키에서 태어나
그리스에서 주로 활동한 역사가다. 그는 역사(Historiai)라고 하는 책을 남겼다. 헤르도토스는 역사라는 말을 진실탐구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래서 역사는 사실 그대로 기록하고 전해지는 것을 그대로 서술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사실 확인을 위하여 당시 인으로서는 광범위한 현장 답사를
했으며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진실성이 없으면 그것은 역사라고 할 수 없다. 이 역사 앞에 부끄러움 없는 자기를
남기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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