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아홉에 엄마는 마지막 딸을 낳았다. 가을이 머지 않은 여름의 끄트머리에서 배가 땅에 닿을락 말락하게 손을 당겨 끝여름 참외를 따고 있었다. 여덟 번째 아이였지만, 뱃속의 아이가 무사히 목숨을 이어가기만 한다면 엄마에게로 그딸은 다섯째 자식으로 남는다.

첫째 아들은 열 일곱 살에 그 삶을 마감했다. 그 아래 두명의 계집 아이도 이유 없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그래서 아픔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든 건, 내가 엄마 만큼이나 아픈 일을 겪은 이후였다.

점심 무렵이 되자 산통을 느끼게 되었다. 자칫하다간 참외밭에서 아이를 낳을 것만 같아 바구니에 담은 노란 참외들을 그대로 두어야 했다. 물이 데워지기도 전에 울음보를 터트리고 나온 아이는 속상하게도 '나'라는 계집아이였다.

음력 7월 4일 한낮의 눈부심보다 딸이라는 그늘로 엄마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두 가지와 기억 못하는 하나까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야 이 세상은 나에게 뿌리를 내어 주었다.

가끔, '난 왜 살고 있는지…' 넋두리처럼 생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대로 눈감고 죽으면 아픔을 잊을까'

엄마가 들으면 '나쁜 년' 할 소리를 생각하며 사는 날도 있었다.그래도 몇 번씩 돌려 받은 삶이니 살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거라고, '너 존재할 것'을 어디선가 속삭인다.

그 딸이 서른 다섯 살이 되니 엄마는 거기에 서른 아홉을 더해 일흔 넷의 할머니가 되었다. 사람들이 엄마에게 할머니라고 하면 듣기 싫었던 때도 있었다.

엄마가 딸이 다니는 학교에 찾아오는 경우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였다. 단정한 머리에 한복 차림의 엄마는 동그란 운동장을 눈부시게 했다. 과감하게 파마도 하고 변화에 적응하기는 보호색이 짙은 엄마에게 통하지 않았다. 차라리 곱슬곱슬한 흰머리 할머니보다 검은 머리로 염색하고 올빽으로 넘겨 올린 그 모습이 더 우아하다는 생각으로 나의 바램도 접기로 했다.

그런 엄마가 한밤중에 복통을 일으켜 응급실로 실려갔다. 당직 의사의 전문 분야가 아닌 증세라 해서, 진통제만 맞으며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는 또 다른 의사를 기다려야 했다. 여러 가지 검사에도 뚜렷한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중환자실에 누워 생과 사를 넘나들 때, 의사는 보호자들을 자기 앞으로 모이게 했다. CT촬영한 사진을 뷰박스에 걸어 놓고 형광등을 켰다. 엄마의 뱃속 피사체가 되는 모든 부분이 불빛 안으로 모여들었다. 의사가 말해 주는 '위'라는 곳이 '간'이라는 곳이 엄마만큼이나 예쁘게 매달려 있는데, 엄마는 침대 저 끝에서 마치 자신의 장기를 다 뜯어 내놓은 고통처럼 신음하고 있었다.

맹장도 아니다. 이유를 모르겠다. 의사의 자세는 지휘관이었고 듣는 우리는 명령을 기다리는 병사였다. 다음 수색 작전을 들으며 총알이 몰려오는 전쟁터에 초조히 서있는 기분이었다.

뱃속을 유리알 속처럼 들여다볼 수 있다던 CT촬영기는 검사비 올려놓는 역할만 충실히 했다. 일단 개복을 해 봐야 알 것 같다면서 가족의 동의를 구했다. 혹여 암이 저 정도 커져있으면 덮어야 한다는 말도 습기없이 내뱉였다.

다른 병원으로 가게 되면 가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우리를 더욱 긴장시켰다. 어떤 식으로든 엄마의 운명이 판가름나게 되어 있었다. 보호자 동의서라는 것은 한 점의 실수라도 의사의 나 몰라라에 동의한다는 것이었고, 수술을 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가족의 싸늘한 싸인이었다.

수술실 문이 닫혔다. 저승 문이 닫히는 것만 같았다. 곧바로 눈물이 나왔다. 막내딸이 우는 소리는 저승까지 들린다며, 그래서 못 간다고 나를 볼 때마다 안타까워했던 엄마였다. 그 말을 생각하며 엄마가 저승에 가다가라도 다시 돌아오라고 울기만 했다.

문이 열리고 의사는 초록색 마스크를 담담히 풀어 내렸다. 보호자 한 명만 들어오라는 그 말이 환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오라는 것만 같아서 나는 소리내어 눈물을 터뜨렸다.

용기 내어 언니가 보고 온 것은 창자가 터져, 그래서 CT촬영기가 알아내지 못한 이유와 다시 이어주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엄마가 정말 막내딸 울음 소리를 들은 거였을까!

자식을 여덟이나 낳았으면서 셋째를 가졌다고 말하던 날 미련하다고 소리지르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으면 '그만 먹이고 우유 먹여라. 네 피를 빨아먹는 것만 같다'며 마음 아파했다. 외손주에게는 너 왜 내 딸을 귀찮게 하느냐며 웃음으로 야단을 치기도 했던 엄마가 좀 더 이 세상을 살 수 있었다.

가끔 소리를 참는 흐느낌이 들릴 때는 여러 날 집에 오지 않는 아버지의 자리에서였다. 그것이 엄마의 삶이려니 여기며 어린 날이 지나갔다.

결혼을 했다. 어버지보다 덜한 남편임에도 작은 꼬투리에도 관대해지지 않고, 여러 날 타는 불빛과 가슴을 마주했다. 엄마는 어떻게 견딘 거냐고 나는 하나도 안 아픈 척 태연하게 물었었다.

"구름처럼 지나가니까 살았지, 구름처럼 지나갔었으니까…"

엄마의 그 한마디가 오랫동안 떠나지 않는다. 내 마음이 엄마처럼 아플 적마다 견뎌야만 하는건가. 차라리 듣지 못함보다 부담스럽게 각인되었던 '그름이 지나가듯' 이라는 말. 내 삶의 아픔도 구름처럼 보내야 한다는 듯, 엄마가 이 세상에 없는 날에도 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듯…

언제나 나는, 얼마나 구름이 지나가듯 살아야 아퍼지지 않으려나 그러고 보니 그 구름이 엄마의 새하얀 웃음을 닮아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