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우, 박승각, 박승만 지사를 마주하다

잎을 떨군 나목들 사이로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 망루의 외벽은 악명높았던 일제 잔혹상의 상징물로 각인된 탓에 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긴장이 됐다.

그러나 역사관 안에서 마주한 옥사 외관은 고색의 붉은 벽돌을 3층 높이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고옥으로 다가와 '잘 지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만큼 보존 상태가 좋았다.   

일행은 제암리에서처럼 역사관을 둘러보기 전 사형장 건물 앞에 옥중 순국한 독립운동가 90명의 이름을 새긴 추모비에 헌화 묵념했다.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한 서대문형무소는 1907년 일본이 대륙 침략을 목적으로 우리나라를 강제 점령하고 이에 항거하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감금할 목적으로 일부러 대한제국의 상징물이 있는 독립문 근처에 지었다고 한다. 독립공원은 형무소를 비롯해 사적 제32호인 독립문과 독립관, 순국선열추념탑, 3.1독립선언기념탑 등이 배치돼 선조들의 항일운동 정신이 깊이 서려있다.

지금은 당시 지사들의 수감 생할을 충분히 체감할 수 있도록 역사관으로 재활용하면서 각종 영상물과 사진자료들을 비치하고 자원봉사 해설사를 활용해서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이 감옥에서 김구 선생, 유관순 열사,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외에도 4만여 독립운동가가 옥고를 치렀고, 순국한 열사만도 4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순국 열사 중에 월곶면 개곡리 출생 임용우와 옥고를 치렀던 박승각, 박승만 지사의 모습을 사진으로 마주할 수 있어서 학생들의 애향심과 자부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안창호 선생의 '나의 사랑하는 안해(아내) 혜련'으로 시작되는 16쪽짜리 자필 옥중 서한을 읽으며 훌쩍이는 두 여학생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기자도 가슴이 데워졌다.

아! 통곡의 미루나무여

극악무도한 고문 만행을 재현해 실물 인형들에게 입힌 독립운동가들의 성마른 비명과 살벌한 심문 효과음에 간담이 식어서인지 자꾸 콧물이 흐르고 한기가 들었다. 학생들도 어깨를 움츠린 채 발을 동동거렸다. 외투로 몸을 감싸는 것으로 가시지 않는 추위는 당시 감옥 생활이 어떠했는지 절로 상상케해 진저리가 쳐졌다.

고문과 심문에 식어가는 육체, 빛 한줄기 스미지 않는 한 평 마루바닥. 전깃불에 드러난 그 작은 감방에 잠시 서봤다. 로마의 폭정에 항거하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지하감옥에 갇혀 한센병(나병)자가 된 후 야외 동굴로 버려지던 유대인들을 그린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다. 사형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마주한 한센병자 격리 옥사 앞에서는 발길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  

변기가 없는 한 평짜리 지하 감옥. 먹을 것을 주지 않았을 테니 변기가 필요 없던 감방. 결코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될 독립운동가의 피흘림을 민족정신의 초석으로 삼아야 할 우리나라 대한민국. 그 정체성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가슴에 청량한 결빙감을 느꼈다.

형식적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지사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우리는 사형장에 들어가기 전 붙들고 생에 이별을 고하며 통곡한데서 이름 붙여진 '통곡의 미루나무'를 어루만지며 그날 지사들의 애끓는 심정을 가늠했다. 미루나무는 기억할까? 오매불망 조선의 자주독립을 꿈꾸며 불의와 죽음에 맞선 선열들의 울부짖음을…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데

사형장 밖으로는 사체를 내다 버리기위해 뒷산-安山-으로 통하는 40m 길이의 비밀 통로가 뒤늦게 발견돼 역시 공개되고 있었다. 편히 쉬는 산. 부디 영혼들은 그러했길 간절히 빌었다.     

"어떻게 지켜 온 나라인데…" 답사를 마치고 출구를 향해 걷는데 언젠가 한 번 있었던 일로 착각되는 데자뷰를 경험했다. 내가 속으로 뇌이는 이 말을 유영주 선생이 대신했을 때.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일제를 청산하지 않고 그 앞잡이들에 칼자루를 쥐어줌으로써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군사독재 시절에서 찾는 듯한 정치인들의 발언이 불편했던 까닭을 이곳에서 찾았다. 국법을 다루는 국회의원들의 당선 선서는 필히 이곳을 견학한 후 행하도록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 선생도 해방 50년이 지난 시점까지 총칼을 앞세운 권력으로 민주인사들을 잡아들여 가두고 일제의 고문 방식을 대물린듯 자행했던 군부의 행태를 상기하면서 한 말이란 것을 대화 중에 알게됐다. 

작은 일에도 곧잘 울고 웃는 너스레마저 허용치 않는 분위기 탓에 흔한 단체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역사관을 나온 학생들도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고 복창했던 제암리에서의 숙제를 되새김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상급학교 진학이 결정된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마음과 시간이 비교적 여유있는 12월 이즈음에 서대문형무소를 답사한다면 어떤 강의보다 효과적인 교육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끝)

동행기 1 ☞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