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와 서대문 형무소는 해마다 삼일절 즈음한 시기에 방송을 통해 어렴풋이 듣고 본게 전부다. 제암리는 독립을 갈망하며 들불처럼 번진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한 지역 주민들을 교회에 불러들여 참살했던 곳이고, 일본인들이 당시 만행을 사죄하는 의미로 불태 운 교회부지에 새 건물을 지어 줬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서대문형무소도 마찬가지다. 간혹 차를 타고 지나며 볼 수 있는 독립문 일대의 우거진 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붉은 벽돌 건물이 일제강점기 때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군들이 온갖 고문을 받으며 쓰러져 간 으시시한 곳으로 상상했을 뿐 방문은 처음이었다.

86년 전 일제의 폭압에 시달리던 조상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일제히 봉기하면서 피흘린 그날의 환희와 고통을 가장 가깝게 체험할 수있는 두 곳을 둘러본 감회는 '백문이불여일견'이었다.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제암리에 도착한 시간이 10시. 사업회가 미리 준비해온 화환으로 23인을 합장한 열사묘를 참배한 후 대기 중인  문화유산 해설사의 안내로 그날의 참상을 기록한 목격 생존자들의 증언을 채록해 제작한 '영원한 햄릿, 아! 제암리' 영상물을 시청하고 보존된 기록물들과 유물들에 대해 추가 설명을 들었다. 해설사는 학생들에게 나찌하 마루타로 종족 보존마져 위태로웠던 유태인의 남다른 역사 의식이 표현된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표어를 복창시켰다. 그리고 그에 못잖은 우리 조상들의 숭고한 독립 정신과 일제의 만행을 기억하자고 말했다. 

'영원한 햄릿, 아! 제암리'
1919년 3월30일. 화성군 제암리, 고주리를 비롯한 발안장 일대 주민 1천여명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제히 봉기했다. 만세운동을 알리는 봉화가 화성군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 수탈과 폭압의 본거지인 주재소와 소학교가 차례로 불타고 점령당했다.

이런 기세에 놀란 일제는 발안장 일대 마을의 친일 앞잡이를 내세우고 보병 1개 연대를 풀어 주동자를 잡아들이는데 혈안이 됐다. 주모자 색출을 목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을 살해한 후 4월15일 제암리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마을의 성인 남자 21명을 교회로 불러모은 후 밖에서 못질하고 불질러 태워죽였다.

놀라 울부짖는 여인 2명도 사살했다. 마을을 방화한 이들은 이웃 고주리 주민 6명도 살해해 불태웠다. 이 사건은 일대를 둘러보던 선교사 언더우드 일행에게 발각됐다. 동료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는 미국 등 외국에 일제의 만행을 타전했다. 이후 스코필드는 한데 엉켜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시신을 수습해 평장으로 장례를 치러줬고, 82년 정부는 이들의 유해를 발굴해 합장하고 위령탑을 세웠다. 

동행한 유영주 시립도서관 기획위원은 합동 묘역 언덕배기에 올망졸망 머리 맞대고 둘러앉은 23개의 검은 돌 조형물을 바라보며 "역사는 늘 선각자들의 숭고한 피흘림을 딛고서야 발전하는 까닭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제암리까지 스며든 역사왜곡 그림자
이번 답사에서 새로 알게된 한 가지 사실은 이곳까지 일본의 치밀한 역사 왜곡이 스며들었다는 점이다. 지난 70년 당시 조상들의 죄를 사죄한다며 '제암교회소타사건사죄위원회'를 구성한 일본인들은 모금한 돈으로 불태운 교회 자리에 하얀색 교회당을 새로지어 마을에 기부했다. 지금은 헐려 자료사진으로만 남아있다.

일행을 안내한 이길원, 김재남 해설사들에게 별도로 청해 들은 사실의 축소 왜곡 의도 전모는 이렇다. 1919년 제암리 사건에 연루된 일본인 후손들은 사죄위원회를 구성해 모금한 1천엔으로 콘크리트 구조의 하얀 교회당을 건축해 기부했다. 하지만 문민정부 시절 노골화된 일본의 역사왜곡에 반발해 일제 잔재 청산 표본으로 철거된 중앙청은 순수한 후손들의 사죄 의미로 받은 제암리 교회 건물에 대한 재평가의 단초가 됐다.

주민들은 일본인들이 지어준 건물 존치 여부를 두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대외적으로는 30년된 노후 건물 철거를 명분 삼아 철거를 결정했다. 마을 주민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가두고 밖에서 못질한 후 불태워 죽이고 탈출하는 사람들과 놀란 주민들을 총칼로 참살한 학살 만행을 '사죄'라는 수사와 함께 '소타사건'으로 축소 왜곡한 '꼼수'를 뒤늦게 발견했던 것이다.

2001년 화성시는 철거한 교회자리에 전시장 시청각실, 교회, 합동묘와 기념탑, 각종 교육시관 3.1운동기념탑 등을 배치하고 일대를 유적지로 정비했다.

교회기부 사건 전모를 설명한 이길원 해설사는 지난해 에피소드 한토막을 들려줬다. 3.1절을 전후해서 왔다는 와세다 대학 정치학부 4년생들이 제암리를 찾아와 자신들이 기부한 교회를 찾더란다. 어른들의 자랑스런 양심 선언 상징물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맘이 우선이던 학생들은 철거 사실을 알고 의아해하며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내더라고. 이 때 이 해설사는 당시 일본인들의 방화 학살 만행을 소상히 알리고, "이같은 사건을 단순히 불지르고 때렸다는 '소타'로 축소한 의도가 무엇이냐?"고 되물어 그들의 의문에 재갈을 물렸다. 그때의 통쾌함을 전하는 해설사의 자부심에, 유지만 이사장은 "우리는 언제쯤 이런 공간을 마련해서 산교육장으로 활용할까" 부러움을 나타냈다.

다음 답사지 서대문 형무소로 출발하기 전 유적지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추운 날 학생들을 인솔한 분진중학교 교사들에게 고마운 마음도 전하고 싶고 시종 진지하고 의젓한 학생들에게도 말을 걸어봐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답사 내내 짝이 된 유 선생과 아침에 만나자마자 "도대채 왜그랬을까요?"로 시작된 '황우석과 정치', '삶과 죽음', '과학과 종교', '우주인과 지구별' 얘기들로 발이 땅에 닿지 않은 듯한 기분이 여전한 때문이다.  

멍한 상태로 두서없이 주고받은 얘기들이 꿈결처럼 달리는 차창 밖으로 달아났다가 다가왔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현실에서 멀기만 하다.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경계를 모르는 중에 조상들의 핏자욱 스민 유적지를 밟은 감회가 좀처럼 바짝 끌어 당겨지지 않아서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