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황찬란한 도시의 밤거리는 연인들에겐 천국입니다.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시원한 맥주를 마십니다. 밤이 깊어지면 헤어지길 아쉬워하며 작별인사를 나눕니다. 집으로 돌아가선 새벽까지 전화기를 붙잡고 속삭입니다. 그리고 아침, 아버지는 새벽같이 나가시고 늦잠을 깨우는 어머니께는 짜증을 부립니다.

무뚝뚝한 아버지, 대한민국 표준 아줌마가 되어버린 어머니.
과연 두 분은 사랑이라는 걸 알고는 계실지 궁금해집니다. 서로에 대한 감정표현이라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따뜻한 말 한마디, 은은한 눈빛 한 번 나누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 만나 이 고생'이라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습니다.

조금 더 앨범을 들춰봅니다.
어울리지 않은 장발머리를 한 청년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교모를 삐딱하게 쓰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고등학생도 보입니다. 다른 한쪽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를 늘어뜨린 아름다운 처녀가 있습니다. 배꽃 아래서 친구와 수줍게 웃으며 찍은 사진은 마치 옛날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 같습니다.

이 사람들, 어색한 장발머리의 청년과 긴 생머리의 아름다운 처녀가 누군지 궁금해집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피로를 양 어깨에 지고 구부정한 어깨로 새벽같이 대문을 나서는 아버지가 장발의 청년이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푸석푸석한 머리, 눈가의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아줌마가 되어버린 어머니가 풍성한 검은 생머리를 묶고 배꽃그늘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처녀였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장발머리 청년과 긴 생머리의 처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태어났다는 사실, 너무도 당연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일에 쫒기고 세상살이에 상처받아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처럼 보이는 그분들에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고 가슴 설레는 사랑이 있었다는 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엄마는 차라리 어디 나가서 죽어버리라는 말을 하고 아빠를 찾아 나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올랐던 나영은 혼자 아버지를 찾아 엄마의 고향인 섬마을로 향합니다. 지나가던 우체부에게 길을 묻는 순간, 나영은 젊은 시절의 아빠와 엄마와 마주하게 됩니다.

더 이상 엄마는 여자다운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억척스럽기만 한 때밀이 아줌마가 아니라 우체부의 자전거 소리만 들리면 얼굴을 붉히는 스무 살의 섬처녀입니다. 착해빠지기만 한 무능력한 아빠는 멋쟁이 우체부로 섬마을을 누비고 다닙니다.
나영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엄마와 아빠의 젊은 시절을 곁에서 지켜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에게도 조심스럽고 잠 못 이루는 날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당연히 있어야 하니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아니라, 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게 아니라 그 가슴 설레던 사랑으로, 이제는 잊혀져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낡은 사진 속에서 웃고 있던 그 날의 기억으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왜 우리는 몰랐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