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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약에, 정명훈이 지휘에 쏟은 열정을 반만큼만 피아노에 할애했다면, 백혜선이 차이콥스키 콩쿨 이후
외국에서 고독한 유랑을 계속했다면,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백건우가 자기 결벽을 이기고 조금만 더 오지랖을 넓혔더라면… 아마도 우린 지금쯤
제2의 아쉬케나지, 아르헤리치, 브란델을 볼 수 있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다.
정명훈, 백혜선, 백건우가 못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웬걸, 우리나라는 세계가 인정하는 클래식 영재의 산실이다. 90년대 들어 등장한
신성들만 해도 장영주, 장한나를 필두로 이유홍, 이상화, 고현주, 이유라, 고봉인, 손열음, 김혜진, 최근 부쩍 조명받고 있는 임동혁·동민
형제까지, 얼추 꼽아도 열손가락이 모자르다. 김포에서도 9살 윤아인 양이 올해초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 편입해 코스를 밟고 있다.
그런데 뉴페이스들은 대개 시간이 흐를수록 기대만큼 성장해주지 못한다. 중장년 비르투오조들은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항상 2프로가
부족하다.
2. 이달 초 베를린 필하모닉이 내한했다. 카라얀 말년에 한번 들른 적이 있으니까 20여년만이다. 포크락
가수 밥 딜런을 존경한다는 상임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첫날 공연 후 한국 청중의 인상을 묻는 질문에 "classic is not a
classic(클래식은 명품이 아니다)"라는 답을 했다지.
취임 3년만에 세계에서 가장 고답적인 오케스트라를 자기 입맛대로 주무르는 지휘자는, 한눈에 이벤트성 콘서트에만 열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기과시적인 문화
소비를 꿰뚫어 본 것일까. 지나친 권위, 의전으로 인해 계층간의 문턱을 높이는 엄숙주의의 폐해와 이로 인한 클래식 저변의 빈약함을 에둘러
지적한 것일까.
이번 아시아 투어에서 한국에 관한 공부를 어디까지 했는지 모르겠지만 꽤나 잡다한 사상 편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괴짜 지휘자의 촌철살인이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하다. 오만, 열등의식, 혹은 맹목적인 내셔널리즘에 빠져, 아니 이유야 어쨌든, 전인류에의 값진 유산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는
우리의 경직된 모습을 나무라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기대주들은 조로하고 중견들은 말라버리는 풍토병의 원인일 것이다.
3. "늦은 퇴근길에 48국도를 달리다보면 집으로 가는게 아니라 먼 유배를 떠나는
기분입니다." 김포로 이사온 이주민 H씨가 기자에게 보냈던 e메일의 내용이다. 몇번 소식을 주고받다가 연락이 끊긴 것이 3년 전의
일이니 다시 어디론가 이사를 갔겠지 싶다. H씨는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갖기 어렵다"며 "김포에서의 팍팍한 생활"을 자주 호소했다.
어느 행사장에선가 안면이 있는 아주머니들 일단이 기자를 둘러싸고 불만을 쏟아놓았다.
"김포는 정말 볼게 없어", "김포는 밥먹고
잠만 자는데야"
>> "찾아보면 볼거 들을거 꽤 있어요"
"시장님한테 돈 좀 쓰라고 그래. 가수들도 자주
부르고"
>> "… 그냥 댁에서 열린음악회 보세요"
4. 글머리에 백건우가 아쉽다고 했는데 역설적으로 그는 '아쉬움'으로서 독특한 음악적 색채를 지니게
된 연주인이다. 예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피아니즘은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거장의 칭호가 어색하지 않다. 최근에 베토벤 중기 소나타
녹음을 끝내고 9월, 10월 두달 동안 지방 순회공연을 가졌다. 서울, 부산, 대전 등 대도시 외에 성남, 안산, 평택, 원주, 진주, 순천,
양산, 춘천, 당진이 순회 일정에 포함됐다.
김포에서 백건우 콘서트 개최를 기대하는 건 욕심일까. 티켓 구매력 때문이라면 규모가 김포와 비슷한 순천, 양산, 춘천 공연이 성황리에 막을
내린 것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번듯한 공연장이 없어서? 뻔한 자치단체 살림살이가 얼마나 차이 난다고. 공연지 결정은 결국 그 도시의 문화적인
역량에 좌우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역에 따라 문화의 이해도가 특별하게 다를리 없다. 다양한 문화에 대한 구성원들의 관심과 참여, 곧 적극적으로 향유하려는 의식이 그
도시의 문화적 역량을 가늠하는 척도라고 본다. 타지역의 신문들을 모니터링하면서 감탄했던 점인데, 당진군은 군민들의 높은 호응속에 각종 문화행사,
공연, 축제를 퍽 짜임새있게 알콩달콩하게 치러낸다. 바로 인구가 김포의 60%밖에 안되는 소도시임에도 공연을 '유치'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호화스런 아트홀
분위기는 아니더라도 거장과 호흡을 같이하며 손놀림 하나하나에 눈을 반짝이고 귀를 기울였을 그곳 주민들을 상상하면 참으로
부럽다.
5. 지난 주말에는 김포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 공연이 있었다. 25일에는
김포시립어머니합창단의 창단 10주년 기념음악회가 개최된다. 이외에 시민회관, 여성회관, 시립도서관, 각 읍면동 문화회관에서는 수시로 공연,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보고 들을 것이 없는게 아니라 정작 보고 들을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었는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매주 한바퀴 둘러볼 정도의 꺼리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럴 수 있다면 생활은 훨씬 덜 팍팍해질 것이다. 시민
한사람 한사람이 그렇게 된다면 백건우 뿐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문화 예술의 도시 김포에서 콘서트를 열게 돼 정말 기쁘다"는 인삿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래 사진과 글은 당진군 관련 홈페이지에 게시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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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에게
피아니스트 백건우씨를 이곳 당진에서 만났어. 만남이라기보다 일방적인 거지.
지난 9월에
당진문화의 전당이 새로 지어졌어. 그리고 몇몇 공연이 있었는데, 이렇게 큰 공연은 처음이지. 백건우씨가 이 곳에서 독주회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을 할 수 있었겠니! 없는 일이었지. 그리고도 믿기지 않았지.
며칠 전에 표를 예매해놓고 그 며칠을 잠을 설첬어. 결혼식 날짜 잡아놓고 기다리는 것보다 더 잠을 못잤단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말이 실감났지.
그리고 어제 저녁 7시30분 공연. 그 때까지도 믿기지 않았었어. 30분전에 도착해서 아이들과 함께 기다렸지. 기다리는 것도
배우는 것이려니하고. 그 때까지도 난 다른 공연을 보러 와 있는 듯 했어. 그리고 약속된 시간. 정확히 등장하는 그 분을
보았지.
그런데, 정말 백건우씨였어. TV에서 보았던 사람, 사진 속에서만 보았던 사람.
조심스레 일어나기 시작하는 긴장감을 누르며 숨도 쉴 수가 없었어. 내가 그 분을 예전부터 좋아해서가 아니고, 음악을 하는 사람이
검은색 연미복을 입고 소년같은 미소로 피아노 앞에 앉아 숨을 고르고 몰입하는 모습이 구도자처럼 느껴져서일거야.
아이들이 곁에 있어서 그런지 몰입은 조금 힘들었지만 베토벤 소나타 8번 '비창'과, 소나타 3번, 소나타 5번을
한시간여 걸려서 연주를 마치고, 잠시 쉬었다가 소나타 23번 '열정'으로 연주회를 마쳤어. '열정'의 마지막 부분이 백미라 사람들이
박수를 그칠 줄 몰랐어. 4번을 다시 나와 허리 굽혀 인사를 하시더라. 인영이는 '열정'중의 일부분이 안산에서 피아노 급수 시험곡이라
좋아하고, 인정이는 소나타 3번의 첫부분을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이라서 그 곳이 좋대. 인경이는 아직 모르고 듣는 것 같았어. 마치고
인영이에게 사인 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더니 뛰어나가더라. 앞줄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 있지. 난 백건우씨 CD가 없었어. 사실 CD도
몇 장 없지만-컴퓨터 켜고 듣는 것이 싫어서-베토벤 소나타 CD를 사주었더니 거기에 싸인을 받아 왔어. 싸인해주시면서 자기와 눈을
맞추어 주시더래. 인영이가.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가 자기도 모르게 나왔대.
워낙 작은 고을이잖아. 여기 당진은. 아이들 학교 선생님들, 음악 학원 선생님들을 그곳에서 다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작은 고을의
맛인가보더라.
어디에서나 문화예절을 목숨걸고 흠집내는 사람은 있어. 그 부인은 백건우씨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은막의 스타
윤정희씨의 남편을 찍으러 연주회에 왔을거야. 연신 디지털카메라를 눌러댔지. 아이들이 오히려 공연 예절을 더 잘 지키는듯 해.
우리나라의 문화예절을 '이 아이들이 지켜가겠구나' 싶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이름 걸고 날아 다니는 음악가라면 누구나 하는 대학 교수도 않하고 오로지 연주자의 길만 가는 그 분의 그 순수성이 좋아서 며칠
아른대겠지. 마치 고요한 호수 위에서 은비늘이 때론 병아리 발걸음처럼, 때론 격렬한 폭풍우처럼 춤추는 듯 했는데. 그렇게 음반 위에서
춤추던 그 분 손이 한 동안 잔상으로 남을듯 해.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파흘벨의 캐논을 크게 틀어 놓고 들으며
왔어. 가로등도 조는듯한 밤 거리를.
넉넉한 문화를 누릴 수 없어 늘 배고픈 것 같은 삶은... 이러면 병날거야.
아니야, 배부른 소리일지도 몰라. 지구상의
80%의 인구가 부족함 속에서 산다잖아.
아이들이 추워하지 않았으면 오래도록 앉아서 T-셔츠 차림으로 싸인을 하며 미소짓는 모습을 좀 더 바라보는 여유를 만끽하다 돌아올
수 있었을텐데... 그런 아쉬움이 남아 있었지만... 좋은 밤이었어.
가을 소나타가 흐르는 밤을
보내고....MK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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