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아버지는 딸이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결혼은 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앉아서 술잔을 기울일 뿐입니다.

남자가 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여자를 좋아하지만 쉽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녀가 찾는 오래된 책이나 음반을 정성스레 구해주고 그녀의 일을 도와줍니다. 고서점을 운영하는 남자는 일이 없는 날이면 시내의 전철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MD와 마이크를 들고 거리로 나섭니다.

도시는 여전히 바쁘게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어디를 향하는지 급한 발걸음을 옮기고, 오후의 카페는 조용합니다. 남자는 커피를 마시고 여자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마십니다. 둘은 여자가 취재하는 음악가가 자주 가던 옛날 카페를 찾아 시내를 헤매기도 합니다. 남자가 전철의 소리를 녹음하러 가고 없는 날엔 여자 혼자 음악가의 옛 연인을 만납니다.

일상은 여전히 조용합니다. 여자가 살고 있는 동경의 풍경은 그래서 마치 그림 같습니다. 여자가 살고 있는 작은 방, 그녀가 그곳에서 그림 속의 인형처럼 잠들어 있습니다. 낡은 책으로 둘러쌓인 공간에서 생활하는 남자 역시 조용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림처럼 잠들어 있는 그녀의 곁에서 남자는 그녀를 위해 조용히 요리를 합니다. 모든 전철의 소리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는 남자는 틈이 날 때마다 전철 소리를 녹음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요코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하지메 역시 그녀의 임신사실을 듣고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녀가 힘들 때마다 곁에 있을 따름입니다. 모두들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살아갑니다.

<카페 뤼미에르>의 진짜 주인공은 도시, 동경의 일상인지도 모릅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전철, 옛날 음악가가 자주 찾았던 서점, 그리고 이제는 사라진 카페, 요코가 자주 들러 따뜻한 우유를 마시는 조용한 카페 같은. 한편으로 지루해 보이고 차가워 보이는 도시의 일상이지만 요코와 하지메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옛 음악가의 삶을 따라가는 요코와 전철의 소리를 담는 하지메, 두 사람은 가깝지만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잡으려고 손을 내밀지 않는 사이, 요코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메에게 임신사실을 이야기하고 하지메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입니다. 같은 방향을 향하는 다른 전철 안에서 서로를 보지 못하고 엇갈렸던 그들이지만 결국엔 전철 안에서 마주치고 같은 곳에서 내려 일상을 기억하게 됩니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납니다. 아무런 일도 이어나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걷고, 전철은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며 달리면서 말입니다. 마치 우리의 일상처럼. <카페 뤼미에르>가 지루했다면 우리의 일상이 그만큼 지루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일상은 지루한만큼 조용하고 아름답게 흘러갑니다. 요코와 하지메가 살고 있는 동경의 일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