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물러가는 여름의 뒷풀이 마당처럼 연신 목덜미를타고 흐르는 땀이 옷을 적시는 호되게 무더운 날씨였다. 하성면사무소 뜰에서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들과 합류해 찾아간 곳은 200여년 한 터에서 7대째 살고 있다는 하성면 마곡리 민경태(86세)옹 자택. 마을길이 막힌 지점에서 만난 350년생(82년 시 보호수로 지정 당시 수령) 느티나무가 오랜 터전임을 대변했다.
   
최영묵(문학박사,국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 박사팀이 지역 원로들을 만나 구술 채록중인 1860년대 구한말 부터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0년대까지 김포 근현대사 재조명 활동에 동행한 길이다. 지역 원로들로부터 듣는 옛 얘기는 글로 읽는 것보다 생생하고 흥미로워서 회를 더할수록 김포에 관심이 깊어짐을 느낀다. 안내는 예정대로 국편 지역위원인 유지만 전 문화원장이 맡았다.

민 옹 부부가 기거하는 고택은 뒷뜰은 참나무와 밤나무 숲이 울창하고 사랑채 밖은 들인데도 구조상 통풍이 더딘지 집안 공기가 유난히 습하고 끈끈하게 느껴졌다.  

민경태 옹이 기억을 더듬으며 자료를 찾고 있다.

휘문고보와 경성공과대학 시절 졸업장 및 사진등속, 그 시절을 가늠할 자료가 남아 있는지 물었지만 당신 것들은 "모두 황해도에 두고 왔다"는 답변이었다. 인텔리 청년이 전쟁중 겪었을법한 이념 갈등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민옹의 자취는 항일 운동에 앞장선 지역 선배들이 일제의 감시를 받고, 한국전쟁 후 좌익으로 고초를 겪거나, 월북 등의 소문하에 행방이 묘연한 것과는 일면 대조적이다. 한 때 잠시 지역항일 운동가 선배들이 이끄는 인민위원회에 가담해 활동한 경력이 있을 뿐이다.

"해방되니까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다닌 신채수씨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았어. 3.1만세운동을 주동한 어수갑, 정준씨가 같이 활동했지. 정국이 불안정 할때라 치안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정준(제헌 국회의원 역임)씨가 보안대장을 맡았어. 지금 김포경찰서자리쯤에 무도장이 있었는데, 정준씨가 경무과장을 후려친 사건이 있었어. 지역의 이슈였지. 내가 스물여섯살 청년 시절인데 어수갑씨를 몹시 따랐기 때문에 불려가서 치안 유지일을 도왔어. 세월이 지나고 전쟁이 나니까 좌익이니 우익이니 가르고 했지, 그 때는 사회주의 이념보다 반일감정이 지배했어. 나는 해방 맞은 그 달 지나고 바로 9월에 서울 군정청으로 발령을 받았어. 그 이듬해 부터는 대학 은사인 최윤식 학장이 불러다가 대학에서 일하라고 권해서 16년 동안 서울대학에서 측량학을 가르쳤지. 한 4년은 한양대학에서도 가르쳤고.... 칠십 넘은 훌륭한 제자들이 많아." 사회인이 된 후 민옹의 기억에 저장된 일대기다.

3년전 큰 수술을 받기 전까지 부친 민정기씨가 대물린 농사를 지으며, 문화원과 시 노인회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자랑스런 김포인상을 받았다. 

일제 강점 말기 김포의 농지는 30정보(1정보=3천평) 이상의 농토를 소유한 대농이 많았던 지역이다. 민옹은 하성 인근엔 일본인 소유 농장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부친은 1만여평 논을 가족과 자작했다. 한국 전쟁전 자녀들에게 분배해 농지개혁때 수용된 토지가 없었고, 부친과 막내아우가 지켜온 토지를 11년전 낙향한 민옹이 현재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 평야 지역 농민들은 많게는 생산량의 7할을 군량미로 뺏기는 악랄한 수탈에 시달린것으로 기록돼있다. 아쉽게도 김포 원로들로부터 일제의 만행을 직접 듣지 못했다.  
일제 감점기에도 지역의 토호들은 자녀들을 서울의 유명학교로 유학 보내고 장래를 보장받는 평탄하고 무난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민옹의 집에서는 아버님이 간직해오신 '제례요람'과 수첩형 직계자손 족보 필사본등 고문서 서너권이 자료로 확보됐다. 민 옹은 "이제사  이런것이 뭔 필요냐 필요하면 다 가져가라"며 선대의 손 때묻은 고문서 보존에도 애착을 보이지 않았다. 61년간 타향살이를 접고 본가로 돌아와 안식중인 노부부에게는 더할것도 뺄것도 없는 무상이 읽혔다.
 
돌아오며 “재물은 분뇨(똥거름)와 같아서 한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라던 경주 교동의 평판 좋던 최부잣집의 가훈이 입속을 맴돌았다. "부자 망해도 3대 간다" 말을 실감하는 여정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