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는 조강이 꾸려간다는 말이 있었지. 전쟁전 조강리는 100여호가 밀집해 사는 아주 큰 동네였어."

1911년 월곶면 조강리에서 출생해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까지 조강리에 살면서 조강포구의 흥망을 지켜 본 정원석(96세. 서울) 옹의 일성이다.

최 박사팀이 수행중인 근현대사 채록 작업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권력 중심으로 기록된 역사의 누락이나 왜곡 부분을 농지를 삶의 근간으로 살아 온 서민들의 구술 채록으로 보강하는 것이 목적이다.

전년에 비해 기력이 많이 쇄한 걸 실감한다는 정 옹은 2시간여 동안 생의 전환점이 된 일화와 사건들에 대해 놀라운 기억력을 발휘해 듣는 이들을 감동시켰다.

정 옹은 5남 4녀를 낳아 기르며 1950년 한국전쟁이 나던 해까지 고향인 조강리에서 포구의 흥망을 고스란히 지켜 본 생존 최고령자다.

-"내 운명은 이의종 선생님이 바꿨다"
"내 운명은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학재) 시절 스승님이 바꿨다"는 말로 시작된 정 옹의 회고담은 78년 미국 이민생활 중 건강이 나빠진 아내와 82년에 귀국해 이듬해인 70세에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뜨기까지 "꿈에도 그리운 조강리"가 중심이었다. "조강리에 묻힌 아내와의 합장"을 원한다는 유언으로 회귀본능을 설명했다.

정 옹 회고담의 핵은 월곶보통학교 재학 시절인 열 세살 때 조강리 문맹퇴치에 공헌을 인정한 일본인 교장에게 받은 표창장. 200석 월곶 부자였던 할아버지 덕에 동네 서당교육을 받았으나, 신식 교육(일제 강점기 보통학교, 현재 초등학교)에 대한 호기심으로 들어간 학교 교육은 특별하지 않아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만두고 싶다는 인사를 하기위해 만난 이의종 선생은 "내 운명를 결정 한 분"으로 여길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선생은 정 옹의 학력 수준에 맞춰 월반을 권한 후 4학년 겨울 방학 40일 동안을 투자해 매일 밤 12시까지 5,6학년 교과 과정을 전부 가르쳤다. 제자의 고등보통학교 입시 자격 획득을 위해 쏟은 이 선생의 열정은 헛되지 않아 200명 모집에 408명이 응시한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렇게 고마운데 그 때 조강에서 많이 잡히던 새우와 농어 한마리 갖다 드리지 못했다"는 아쉬움 토로는 오늘날의 교육 현실과 극명히 대비되는 인간사 정리로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참 기특한 일
정옹의 당시 나이 13세. 배우는 기쁨을 깨달은 소년은 손자를 신임하는 할아버지를 졸라 연필 16자루와 공책16권을 선물받아 본댁 큰 방을 터 야학을 열었다. 한글 모르는 동네 처자 16명을 대상으로 언문(한글)과 구구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스승이 그랬듯이 겨울방학 40일 동안의 교육은 지금 생각해도 "참 기특한 일"로 여기는 잘 한 일이다.
 
조강포구를 드나드는 서울 손님들에 의해 전해진 얘기책(장화홍련전, 임꺽정 등)을 읽는 여자들의 글읽는 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이를 귀히 여긴 이장의 제보로 월곶보통 학교 일본인 교장은 친필 상장을 내렸다.

정 옹이 "가보"로 여기는 이 표창은 정옹으로 하여금 22세에 월곶면 협의회 의원당선을 시작으로 학무위원에 선출되는 계기가 됐다. 1946년엔 현재의 학원격인 '강습소'를 설립하고 18년 동안 어업협동조합장을 연임하는 등 가르치는 일로 지역 유지의 역할을 다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한 때 조강나루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서울로 운송되는 온갖 물자를 싣고 올라오는 배들이 물길을 재며 머무는 곳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조강은 물길이 고르지 않아 뱃길 안내를 업으로 삼은 이들이 많았다. 당시 조강리는 100여호 초가가 큰 마을을 이뤄 소재지 보다 인구가 많았다. 양조장과 주막집이 3개소 있었고, 여성들의 입성이 다를 만큼 물자가 풍성했다. 그러나 1950년 강건너 개풍에서 들리는 요란한 총포 소리와 불꽃을 시작으로 전쟁이 발발했고, 도강한 100여명의 피난민과 숙식을 함께했다.

그러나 정전협정을 맺은 53년 추석을 앞두고 떡을 만들고 있는 정 옹의 집에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후퇴하던 인민군 대좌가 지역 빵갱이를 앞세워 들이닥쳤다. 전선에 따라 마을사람들이 좌우익으로 나뉘던 이념 갈등의 시절. 사위가 주재소에 잡혀가고, 어제는 이장과 마을 사람 열 세명이 죽었고, 우익들을 창고에 넣어 몰살시킨다는 흉흉한 소식들이 난무하던 터라 대좌의 총부리에 밀려 집안에 들어서던 정 옹은 무기로 쓸만한 농기구가 보이면 먼저 공격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집안엔 농기구 대신 새끼만 한 묶음 보였다. 그 새끼에 몸이 묶인채 죽음을 기다리는 정 옹의 눈 앞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회전 의자에 앉아 정씨를 고문하던 인민군이 누가 건드린 것처럼 퍽 쓰러졌다. 학질이었다. "평생 살면서 누구를 아프게하거나 음해한 적이 없으니, 마을이 좌우익으로 나뉘어도 꼬투리 잡는이 없었다"는 정 옹은 기적같은 천운을 운명론이 아니고선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나이 90되니 철이 들었다"
선박 네 척을 보유한 호시절 풍어가 지속돼 "돈을 가마니로 벌어들인다"는 소문은 사실(마대에 담아 날랐다)이고, 마을의 대지 절반을 소유한 적도 있다. 그러나 전쟁 후 폐쇄된 조강리 6번지 6천여평 대지는 훗날 통진학교 설립 밑천으로 헌사했다. 정전 후 돌아 온 조강리는 휴전선으로 강이 막히고 망초가 무성해 포구의 옛 영화는 역사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조강에 띄우는 '평화의 배'
정 옹이 구술한 조강리는 지금은 출입이 통제된 채 흔적없이 사라진 조강나루의 역사적 의미외에도 생활상을 상상할 수 있게하는 힘이 느껴졌다.

최 박사는 "기록 역사와 당시 사람들의 체험담 및 증언을 맞춰보면 사실에 근접한 기록이 될 것"이라고 작업에 의미를 부여하고 "일제강점과 전쟁이라는 역동의 근현대를 지나며 불가피했던 잦은 주거 이동이 당시 제도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문서들의 소실과 유기를 부추긴것은 아쉽다"고 말했지만 기자는 실제 조강나루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들은 것으로 족했다.
 
머잖은 날에 아이들 손을 잡고 조강나루에서 출발하는 개풍행 나룻배를 탈 수 있길 꿈꾼다. 그 때 정 옹이 들려 준 조강나루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때마침 내일(27일) 인천과 김포 지역 시민단체들이 정전 52주년 기념행사로 조강에 '평화의 배'를 띄운다는 소식은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