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에게나 추억이 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일들은 시간이 흘러가고 나면 하나의 추억이 된다. 부모님에 대한 추억, 형제 자매가 어린시절 같이 살았던 추억, 학창시절의 추억, 연애시절의 추억 등 불행이든 행복이든 모든 과거는 추억으로 남게 된다. 이 추억 가운데 고향에 대한 추억은 다른 어떤 추억보다 오래토록 사람의 머릿속에 남아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고향에 대한 추억을 향수, 즉 노스탤지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남북이 둘로 나누어지면서 실향민이 일천만 명에 달하고 최근 산업화,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평소 향수심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졌다고 보아야할 것 같다. 그 증거가 명절 때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향길이 미어 터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향수심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고향산천을 그리워하는 마음, 고향의 옛집을 그리워하는 마음, 고향의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고향마을 동리 어귀에 서 있는 정자나무를 그리워하는 마음 등, 그리움의 대상도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많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에게도 이 향수심은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 나의 고향은 경남 하동이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어머니와 나의 삼형제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를 부산에서 시작하면서 그 이후 지금까지 고향을 떠나 사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래서 향수심은 더 깊어졌다고 할 것 같다.

사진출처: 네이버(www.naver.com)

나는 고향하면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제피나무이다. 이 나무는 나에게 고향의 맛을 잊을 수 없게 하는 나무며 내가 공부하는데 큰 도움을 준 나무이기도 하다. 이 제피나무는 산초나무와 너무나 흡사해서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이 두 나무는 나무의 모양과 꽃의 모양이 비슷하지만 개화시기와 열매의 완숙기는 각각 차이가 있다. 제피나무의 개화시기는 5월과 6월이며 열매의 완숙기는 초가을이다.

산초나무는 9월에 개화해서 늦은 가을에 완숙된다. 제피나무는 우리나라 남부지역과 중부 해안지역에 주로 자생하고 있지만 산초나무는 한반도 북부를 제외한 전역에 자생하고 있다. 그리고 제피나무의 잎과 열매 껍질은 톡 쏘는 맛이 매우 강하지만 산초나무의 잎과 열매는 톡 쏘는 맛이 약하다. 그래서 제피나무의 잎과 열매는 조미료나 향신료로 사용되지만 산초나무의 열매는 기름을 짜서 약용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옛날 우리 조상들은 산초기름을 석유 대신 등화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부지역에서는 제피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해서 다산을 기원하는 뜻으로 한두 그루쯤을 뜰에 심어 기르기도 하였으며 이 나무의 몸에는 가시가 많아 객귀를 물리친다고 하여 울타리옆에 심어두기도 하였다. 특히 경상도 지역에서는 봄철 갓김치를 담글 때 잘 다진 제피껍질을 사용한다. 그리고 젓갈류를 먹을 때나 추어탕이나 개장국을 먹을 때는 필수적으로 제피나무의 잎이나 제피가루가 조미료로 들어가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이 제피나무는 약간 푸른 빛이 있을 때 덜 완숙된 것을 채집하여 햇빛에 잘 말려야 좋은 맛을 낼 수 있다.
 
나의 어머니는 초가을이면 어김없이 제피열매를 채집하여 일년 내내 조미료로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을 팔아서 나의 학비로 보태주시기도 하셨다. 나의 어머니가 보내주신 제피가루를 부산 보수동에 있는 유명한 보신탕집에 팔아서 학비에 큰 보탬이 되었던 일도 있다.

나는 김포에 정착하면서 집앞에 산이 있어 고향의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산을 바라볼 때마다 고향의 제피나무가 생각났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고향에서 제피나무를 한그루 옮겨서 심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패였다. 그 다음해에는 제피 씨앗을 구해와 집에서 발아시켜 햇빛이 잘 드는 베란다 맞은편 언덕에 심어 보았다. 성공률은 낮았으나 상당수 씨앗들이 정착을 하여 지금 2년 째 잘 자라고 있다. 지금은 그 몸에서 제피나무 특유의 가시가 돋아나 제피나무임을 실증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 나무의 정체를 아무도 쉽게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10년 쯤 자라나면 우리 아파트 주민들은 이 정체불명의 나무 열매를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제피나무를 심은 것은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라고 말한 교훈을 기억해서가 아니다. 나처럼 고향을 떠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향수심을 조금이라도 달래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이 향수심도 지나치면 병이 된다. 그것을 향수병이라고 한다. 반면에 향수심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도 위험하다. 정서가 메말라간다는 것은 점점 인간성을 잃어간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의미에서 나는 제피나무를 심었지만 인간들의 개발이라는 이기적 탐욕 앞에 이 작은 나무들의 설 자리는 없어질 것 같아서 안타까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