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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양을 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상대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고 싶었고,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행복한 순간들이었지만 사랑의 양을 잴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사랑의 양을 재고 싶다는 부질없는
소망 때문에 불행한 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상대방을 더 사랑한다는 생각이 드는 날엔 억울함과 불안함 때문에
밤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나를 더 사랑한다는 생각이 드는 날엔 미안함과 답답함 때문에 짜증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사랑의 양을 잴 수 있다니요,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간혹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자기가 상대방을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은 그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지고 그럴 수만 있다면 상대방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는 순간 사랑은 집착으로, 부질없는 소유욕으로
변해버립니다. 집착이나 소유욕이 사랑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의 다른 이름이 집착이나 소유욕이라는 건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기 위해 무모한 행동을 한 번쯤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어느 순간에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이 집착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헛된 소유욕 때문에 사랑을 잃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영화 <권태>를 보면서 주인공 마르땅이 과연
세실리아를 사랑하긴 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혼한 아내를 찾아간 대학교수 마르땅은 아내의 새 애인과 친구들을 보고 혼자 뛰쳐나와 거리를
헤매다 우연히 노신사와 젊은 여자의 뒤를 쫓습니다. 젊은 여자가 혼자 떠난 후 노신사는 술집에서 낭패를 당하고 마르땅이 노신사를 곤경에서
구해줍니다. 노신사는 답례로 자신이 소중히 간직했던 그림을 마르땅에게 전해줍니다. 며칠 뒤, 그림에 적혀있는 주소를 찾아간 마르땅은 그 전날
노신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노신사의 집에 들어선 마르땅은 온 집안을 장식한 젊은 여자의 누드화를 보게 되고, 그 순간 그림의 모델인
젊은 여자 세실리아와 마주칩니다. 노신사가 세실리아와 정사를 나누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르땅은 자신도 모르게 세실리아에게 끌리게 되고
그녀와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열정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마르땅과 세실리아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나서 관계를 갖습니다. 너무나 쉽게 그녀와 관계를
맺게 된 마르땅은 겉으로는 그녀에게 권태를 느낀다고 하지만 세실리아가 찾아오지 않는 날이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하루종일 그녀의
전화만 기다리게 됩니다. 어느 순간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 마르땅은 그녀와의 육체관계야말로 사랑의 증거라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육체를 소유하면 할수록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실리아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르땅은
그녀의 뒤를 밟고, 그녀를 추궁하지만 세실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자신도 좋고, 다른 남자도 좋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세실리아를
보면서 마르땅은 절망하고 그녀를 소유하기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주지만 그녀는 두 남자를 모두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마르땅에게 부모님을 소개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병원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마르땅이 아닌 다른 남자친구와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그런 그녀를 보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 애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요'라고 울부짖습니다. 마르땅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세실리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두 사람을 모두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실리아의 모든 것을 소유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마르땅의 행동이 사랑이었다면 두 남자 모두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세실리아의 행동
역시 사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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