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에 크레물린을 향해 떠났다. 승전 60주년 행사로 인해 오전까지만 궁을 개방한다는 것이었다. 30여분을 달려 당도하니 이미 수백 미터에 이르는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었다.

크레물린 성은 1147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15세기에 이르러 총길이 2,235m의 붉은 성벽이 세워진 왕족과 귀족들이 사는 성이었고 1917년 레닌의 볼쉐비키 혁명 후 모스크바가 수도로 지정된 이후 공산당 서기장과 러시아의 대통령이 집무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크레물린은 공산주의의 심장부가 되었고 그 폐쇄성과 비밀주의로 인해 ‘크레물린’이라 하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일컫거나 공산주의 본부를 뜻하는 의미로 해석되어 왠지 불길하고 불안하고 공포스런 존재로 우리의 의식체계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실제로 붉은 벽돌로 둘러쳐진 크레물린 성은 왕족들의 호사스런 궁전인 동시에 침범할 수 없는 요새로서  평민들로서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음모와 모략과 정쟁에 대해 알 수도 없었고 볼 수도 없는 별세계의 공간이었다.
그 안에 사는 인간들은 신비의 인물들이었고 절대권력을 쥔 인간들로서 인민들은 그들을 위해 일하고 그들을 위해 삶을 영위해야 하는 봉사자에 불과했다.  어쩌면 이러한 제정 러시아의 현실 하에서 만민평등을 부르짖으며 브르죠아 타파를 선언한 공산주의 혁명은 당연히 성공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줄을 선지 2간여 만에 몸 수색을 마치고 크레물린 안으로 입장했다. 입장료는 우리 돈으로 1만7천원.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이러한 입장료를 내면서 세계의 관광객이 크레물린으로 몰리는 것은 그곳이 러시아의 대통령 궁이기 때문이 아니라 문화, 예술적으로 볼만한 것들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인민의 피를 착취하며 호의호식하는 왕족들이 그들만의 문화와 예술과 삶을 영위한 곳이지만 역사 속에서 분명 또 하나의 인류가 창조해낸 문화 유산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궁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궁 중앙의 성모승천 앞 광장에 군인들이 도열하더니 이내 근엄한 복장의 러시아 근위대들이 군기단과 기마단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사연인 즉슨 전승 6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세계 정상들에게 보여줄 의장대의 연습이었다. 우리는 운 좋게도 세계 정상들보다 먼저 그들의 로봇 같은 의식 행위를 지켜보는 행운을 얻었다. TV에서 보았던 북한 병사들의 뻗다리 행진과 동일한 군기단의 행진 모습, 인마가 혼연일체가 되어 펼치는 기마병들의 마장마술, 그리고 의장대의 총검을 활용한 기막히게 절도 있고 일체감 있는 제식 모습을 보너스로 관람할 수 있었다.

일행은 군위대를 보느라 지체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성 내부를 돌아보아야만 했다. 성모승천 성당은 내부가 온통 성화들로 채색되어 있어 그 자체가 예술품 이었다. 그 안에서 판매하는 어린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 장식을 구입하며 잠시 이처럼 화려한 성당에서 미사를 올렸을 귀족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왕이 다니는 길이 따로 표시되어 있고 계급에 따라 앉는 좌석 배열이 다른 이 성당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예배를 올렸을 그들은 과연 천국의 문에 들어선 것일까?
 ‘부자가 천국에 들어 가기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 보다 어렵다’고 하였거늘 인민을 수탈하여 그들의 피와 땀으로 배부른 삶을 영위했을 그들이, 그러면서 온갖 음모와 더러운 짓을 행한 그들이, 화려한 성전을 짓고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그림으로 치장한 그들이 천국의 문에 들어섰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이 남긴 흔적은 분명 인류 문화에 한 획을 그었으며 세계적 예술품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지배와 피지배, 권려과 착취, 특권과 불평등, 이를 해소 하려는 끝없는 반동과 인간의 투쟁 사이에서 창조된 역사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세계문화 유산은 가진자들을 위한 혹은 절대권력자(종교 포함)들을 위한 인간 착취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성 안에는 한번도 쏴 본적은 없지만 왕의 권위를 위해 1586년에 만들어졌다는 무게 40톤, 포알무게 1톤의 세계에서 가장 큰 대포가 있었고 역시 한번도 울려본 일이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