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 오월의 언덕에 서면, 내 어릴 때 살던 고향의 초가집과 수수깡울타리, 빨간 복숭아꽃, 그리고 짙은 아카시아 향기와 그 나무 밑에 간즈런히 키순서와 크기 순서로 놓여있었고 그  장독대위에 한사발의 정화수가 그림처럼 놓여 있었습니다. 그 정화수 사발 속에는 낮에는 하얀 구름이 세월을 흘려보내고 밤에는 그리움의 별들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습니다.
 
한사발의 정화수와 어머니! 그 곳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원래 성품이 대단하신 분이셔서 남에게 결코 지고는 못사시는 분이셨지요. 성정이 안 풀리시면 물이라도 한바가지 퍼다가 마당에 확 뿌리셔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이셨으니까요. 그러나 아버지는 대조적으로 마음이 부드럽고 기가 약하시고 호인이셔서 경우에 어긋나는 일을 보아도 그냥 참고 넘기시는 분이셨지요. 그러므로 이웃 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버지 대신에 언제나 어머니가 나셔서 대리전을 치르고 하셨습니다.

어떤 일에도 거침이 없으시고 당차셔서 약한 모습을 볼 수 없었기에 나는 어머니는 외롭지도 않고 고독하지도 않는 분이며 눈물도 없는 분인 줄로 만 알았습니다.

철없는 나는 그것도 모른 채 물 사발에 앉은 빨간 고추잠자리 잡다가 신주단지 같은 그 물 사발을 몇 번 엎지르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튿날이면 그 자리에는 변함없이 놓여있었고. 그 물 속에는 어머니의 하얀 마음과 그리움의 세월이 고기비늘처럼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어머니의 1200일의 기나긴 기도가 영험이 있었는지 형님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단하시던 어머니도 세월을 감당하실 수 없었던지 드디어 77세를 일기로 아버지 곁으로 가시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 장례를 치르시던 날 저녁에 마음이 너무너무 허전하고 쓸쓸해서 어머니가 생전에 거처하시던 방에 둘러 앉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주 먼먼 여행길에 오르셨지만, 새록새록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서러움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족은 서로 마음을 위로하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고 삶의 각오를 다시 다지기로 하였습니다. 유품이라야 4단으로 되어있는 여닫이 장과 그 내용물이 고작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가 일생동안 소중하게 사용해 오셨으며, 어머니의 유일한 재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태껏 그 속을 열어보지는 아니했습니다.

드디어 맏형수님이 그 옷장을 한 칸, 한 칸 뒤져보기 시작했지요,  아! 이게 웬일입니까. 그 옷 갈피마다 꼬깃꼬깃하게 접어서 주름도 펴지지도 않는 채 천 원짜리 지폐와 만 원짜리 지폐가 옷 갈피마다 수없이 꽂혀 있었습니다. 어떤 곳에는 삼천 원, 사천 원, 또 이천 원 어떤 옷 갈피에는 가끔씩 새파란 만 원짜리가 몇 장씩 접혀져 꽂혀 있기도 했습니다. 그저 생기는 대로 세어볼 필요도 없이 무작정 옷 갈피마다 끼워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뜻밖이고 놀라 모두 한동안 할 말을 잊고 서로서로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어떻게 돈을 모으셨으며 무엇을 하려고 하셨을까?  어머니의 진심을 헤아리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을 보는 것 같아서 더욱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마 이것을 모으기까지는 수년이 걸렸을 것입니다.

형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평소에 열심히 노인정에 출석하셔서, 그리고 그곳에서 고추장수들의 고추 꼭지를 따주고 하루에 이천 원도 받고, 많은 날은 삼천 원도 받아 오셨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평소에 지나가는 말처럼 “증손녀 대학 등록금은 내가 도와주어야 하는데” 하고 걱정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본인을 위해서는 사탕 한 알도 사 드시지 않으시면서 바로 그런 목적으로 모으셨던 것입니다.

우리형제는 그 이튿날 음식을 싸들고 착잡한 마음으로 그 어머니의 놀이방이요 고추꼭지를 따시던 돈벌이 현장이기도한 노인정으로 친구 할머니들을 방문했습니다. 어머니의 별세에 충격을 받은 히므끄레한 노인들이 우리를 맞이하면서 “효자들이야 효자이고말고 이렇게 찾아 주다니, 고맙구려! 보통 우리는 친구들이 하루 이틀 기다리다 안 나오면 이제 그만 떠났구나 하고 생각 한다오“ 라고 천연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풀죽은 안색에는 친구를 잃은 슬픔과 노년의 쓸쓸함이 베어있었습니다.

소박한 장소이지만 그곳에는 그래도 서로 정서가 맞는 이야기 상대의 친구가 있고 소일거리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 진한 노년의 외로움도 소박한 우정과 소일거리로 견디어 내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광경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너무너무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마음에 가슴이 저려옵니다. 자식이 백이면 뭣하나 이들 노인 친구 한 명만큼도 못한걸.... 그들은 그래도 죽는 순간까지 함께 있어 주었지 않았는가!.........

인간이 가난보다 더 슬프고 힘드는 것은 소유의 결핍이 아니라 인간사이의 사랑의 결핍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인간은 점점 경제적 가치에만 초점을 맞추어 인간본래의 가치와 태생적 특성보다는 기능적인간과 맞춤형인간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한 평의 아파트 평수를 늘려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월이 주는 계절의 희망처럼 막연한 삶이 아닌 희망이 있는 삶. 그리고 평안히 비비고 기댈  마음의 언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식을 낳는다고 다 부모가 아니며 자식을 못 낳았다고 부모가 될 수없는 것도 아닙니다”라는 어느 성직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부모 없는 자식, 자식 없는 부모가 너무 많습니다. 오월의 많은 그 기념일이 의미 하듯이 인간이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서로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선한 이웃이 되어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도리와 예절과 윤리와 사랑이 증진되고 인권이 존중되는 복지 사회가 이룩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