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아내는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다고 이혼하자고 하고 아이는 무식한 아버지가 창피하다고 합니다. 이 아버지에게 내일이나 희망 같은 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살아가기 위해 체면이고 뭐고 모두 팽개치고 거리에서 행인들의 주먹을 온 몸으로 받아냅니다.

아이가 있습니다. 스무 살이 넘었지만 한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아이는 세상을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살아갑니다. 공사장을 전전하는 아버지와는 어쩌다 한 번 볼 뿐이고 폐품을 팔아서 생계를 꾸려가는 할머니와 살아갑니다. 동네 아이들의 돈을 뺏고, 카오디오를 훔쳐내서 팔고, 결국에는 사람까지 죽이는 아이에게 세상은 그야말로 '엿같은' 곳입니다.

자신을 보기 위해 교도소에 찾아온 아버지에게 불편하니까 오지 말라고 하지만 아버지가 넣어 준 빵을 씹으면서 아이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사고로 목숨을 잃고, 할머니마저 치매로 쓰러지면서 아이는 권투를 시작합니다.

류승환 감독의 <주먹이 운다>는 막다른 곳으로 내몰린 두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가진 것을 모두 잃은 전직 아마츄어 복싱 은메달 리스트인 강태식(최민식)과 애초부터 잃을 것도 없었던 스무 살의 유상환(류승범)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이 막다른 곳에 내몰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복싱을 시작합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지만 한편으론 거울의 저편에 있는 존재같은 인물입니다. 태식에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지만 빚 때문에 만날 수 없고, 상환에게는 아버지와 할머니가 있지만 교도소에 있는 그는 가족을 만날 수 없습니다.

태식의 돈을 떼어먹은 사기꾼 원태가 태식을 도와 신인왕전 출전을 준비하고, 상환에게는 교도소 박사범이 있습니다. 태식과 함께 권투를 했던 용대는 자신의 선배였던 태식을 우습게 여기고 태식을 괴롭히고, 교도소에서 상환과 함께 권투를 하는 권록은 상환을 처음 본 순간부터 못 잡아먹어 안달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사각의 링 안에서 만나는 순간, 관객들은 누구를 응원해야 할 지 마음을 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시합을 보기 위해 경기장으로 달려가는 태식의 아들 서진과 성치 않은 몸으로 손자의 시합을 보려고 병원을 나서는 상환의 할머니는 경기장 입구에서 마주칩니다. 물론 그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르지만 관객들은 이미 그들이 그렇게 만나리란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편에 서서 응원을 해야 할 지 더욱 결정하기가 힘들어집니다.

마지막 6라운드가 끝난 링에서 태식과 상환은 서로를 부둥켜안습니다. 그들은 승자와 패자를 떠나서 그 순간까지 버텼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막다른 곳으로 내몰린 태식에게도 같이 목욕을 가고 싶은 아들이 있고, 애초에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상환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두 사람은 목숨을 걸고 그렇게 싸운 셈입니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돼서야 겨우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의 링 밖의 시합은 그 때부터 시작일겁니다. 태식은 여전히 빚에 쫓기며 살아가고 상환은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겠죠.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글을 읽을 줄도 모르던 아이는 할 줄 아는 게 권투밖에 없는 아버지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시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릴지도.

<주먹이 운다>를 보고 나오면서 얼마 전에 본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떠올랐습니다. 두 영화 모두 권투를 소재로 했지만 결코 권투 영화가 아니라는 감독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구석이 많은 영화들입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잘 다듬어진, 그렇지만 너무나 매끄러운 영화였다면 <주먹이 운다>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나름대로 맛이 있는 영화가 아닌가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