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는 속담이 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의 한 부분이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말로 인해 일어 날 수도 있으니 말을 조심하라는 해석이다.

스물 두 살에 만난 사람을 스물 세 살에 헤어지며 했던 그 말은 곧 바로 씨가 되었다.
"나, 이번 여행에서 당신을 잊을 수 있는 사람 만나고 싶어요."

어둠이 이슥한 서울역 광장에서 소리쳤다. 그는 대답이 없고 나는 돌아섰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일 것 같았다. 한마디라도 부르면 돌아 설 수 있을 텐데 끝내 부르지 않았다.

휘청이는 마음을 감추고 태연히 걸었다. 두 명의 친구는 놓쳐버린 기차를 어이없어하며 눈물로 벌개진 나를 경멸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밤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면 거제도로 가는 유람선이 예약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가 택시를 잡아주었다. 자상한 배려였지만 다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정한 저 마음이 내 것이 아닌 채 살아야 한다는 절망감, 어둠만큼이나 막막해지고 바다로 가는 길은 그 삶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이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리는 경부고속도로를 지나갈 때면 스물 세살에 뿌린 눈물의 얼룩이 그 길에 남아 있을 것만 같다.

처음 만나던 날도 그 도로를 지났었다. 둘이 마주앉아 나누던 이야기들, 푸르게 다가오던 사랑의 기억들이 희미해지고 이제는 회상의 길에 서있다. 어쩌다 그 도로를 달리다 보면 그 사랑이 다가오고 있는 것만 같아 눈시울이 흐려진다.

택시에서 내리자 스산한 새벽 공기가 미명의 아침을 열고 있었다. 비릿한 바다 내음은 밤새 달린 피로를 확 깨어나게 했다.

우리는 유람선을 타고 거제도를 향했다. 서울도 그 사람도 점점 멀어져 갔다. 바다는 삶을 포기하라고, 하늘은 포기하지 말라고 나를 달랬다.

거제도를 거쳐 남해안에 자리잡은 상주해수욕장이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미래라고 했던가!

우리는 배낭을 풀고 저무는 바닷가로 뛰어나갔다. 내게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오는 줄도 모르고 운명에 이끌려 갔다.

훗날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 사냥에 지친 포수처럼 괜찮은 여자 만나기를 포기한 채 남은 힘을 다해 바닷가를 거닐다 우리 일행을 발견했노라고.

그가 내 운명의 남자일 줄은 차마 상상할 수 없었다. 단지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몸짓과 순진한 말투가 귀여워 보인다는 생각이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군대를 갓 제대한 동갑내기였다. 얼룩진 나의 마음에 비하면 풋풋한 젊음의 향기가 있었다.

10년이 흘렸다. 헤어질 때 했던 말처럼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어느 새벽 서늘하게 깬 꿈속 이후, 내 첫사랑이 꿈으로 생각으로 불쑥 불쑥 찾아온다.

이제는 전화번호조차 잊어버렸는데 어디에서 바람으로 사라진 그를 만날 수 있으려나…

지금도 수많은 말을 하고 산다. 말이 씨가 되는 실수 같은 건 하지 않으려 해도, 남편에게 아이에게 소리를 높이게 된다. 정말 그렇게 되면 안되는데도 말의 실수는 반복된다.

때로는 다행으로 때로는 실수로, 그 말의 씨는 내 감상을 흐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