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예전에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을 극장에서 보기는 힘들었습니다. 아는 사람을 통해 몰래 구한 비디오테입을 친구들과 돌려보면서 감탄했던 일은 이제 옛날이야기가 됐습니다.

자신의 작품이 일본에서 상영되는 동안은 외국상영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새 작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일본에서 상영된 지 한 달 만에 세계에서 최초로 한국에서 개봉을 한 작품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물려주신 모자가게에서 일하는 소피는 평범한 외모의 소녀입니다. 동생을 만나러 가던 중 우연히 마법사 하울을 만나게 된 소피는 평소 하울을 좋아하던 황야의 마녀의 저주 때문에 90세의 할머니로 변하게 됩니다.

노파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본 소피는 가게를 떠나 황야를 떠돌다 우연히 마법에 걸린 허수아비를 도와주고 허수아비의 도움으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법사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하울과의 계약으로 성을 움직이는 불꽃 악마 캘시퍼와 하울의 제자인 마르클이 살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줄 수 있다는 캘시퍼와 거래를 하기로 한 소피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청소부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에서 보이던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나 정체성의 문제 같은 일관된 사상이나 주제의식이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입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은퇴를 선언했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다시 돌아오면서 달라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90세의 노파가 된 소피가 하는 말들은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도 완전한 악인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웃나라와 전쟁을 일으킨 왕은 아주 잠깐 등장하지만 그 순간에도 악인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왕을 도와 전쟁을 일으킨 왕립마법사 마담 설리번 역시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선한 쪽인지 악한 쪽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소피에게 저주를 건 황야의 마녀 역시 미워할 수만은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소피는 자신에게 저주를 건 황야의 마녀를 따뜻하게 보살펴줍니다.

악인은 등장하지 않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전쟁장면은 섬뜩합니다. 마을은 불바다가 되어 지옥처럼 타오르고 하울은 전쟁을 막기 위해 마왕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사람들이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무시무시한 전쟁과 하울의 변한 모습과는 달리 하울과 소피의 러브스토리는 이전까지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과는 다르게 펼쳐집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키스씬은 물론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왕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았던 하울은 ‘이제는 지켜야 할 게 생겼다’는 말과 함께 소피를 위해 스스로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듭니다. 죽어가는 하울을 살리는 것 역시 소피의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은퇴선언을 번복하고 만들어낸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하기 위해 만들어냈을지도 모릅니다. ‘나이가 들면 잃어버릴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소피의 말이야말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