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봤던 영화를 떠올립니다.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젊은 영화감독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듭니다. 그것도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혹은 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한 남자는 지금 자신의 곁에 있는 여자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을 장난으로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영화가 완성되어 극장에 상영될 때쯤이면 첫사랑과 함께 앉아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별로 사랑하는 것 같지 않은 젊은 부부는 뱃속에 있는 자신들의 아기의 이름을 '꿈틀이'라고 짓습니다. 무뚝뚝한 그들이지만 아기가 태어나면서 얼굴에 웃음이 많아집니다.

무용을 하는 남자와 사랑을 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천사 같은 마음을 지닌 여자는 자신의 병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에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갑니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제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년간 헤어졌다 다시 만나 결혼을 한 부부가 있습니다. 남자는 다시 만난 날 방에서 나눈 첫 키스를 기억하지만 여자는 그날 같이 췄던 춤을 기억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 영화감독이 있습니다.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온 그는 프랑스 여자와 사랑에 빠졌었고 그 이후로는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자신을 인터뷰하는 조감독에게 말합니다. 한 스무 명쯤, 그동안 자기가 잔 여자가 그 정도쯤 될 거라고. 사람들은 운명적 사랑이다 뭐다 하면서 말하지만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다른 사람들도 사실은 모르기 때문에 한번쯤 해보고 싶어서 그러는 걸 거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그동안 잤던 사람들도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을까 라고. 그렇지만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을 하는지, 그리고 사랑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에 관한 영화를…

‘사랑을 믿지 않는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만큼 사랑을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너무도 믿고 싶어서, 누구라도 자신에게 ‘사랑은 믿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닐까요? 사랑을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사랑에 상처받고 사랑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닐까요? 사랑을 믿지 않는 영화감독이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언가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만 눈에 띄게 됩니다. 손을 잡고 다정스레 걷고 있는 연인이, 거리에서 핸드폰을 손에 쥐고 울고 있는 사람이, 술에 취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꽃다발을 손에 들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초조해하는 사람이 자꾸 눈에 띈다면 당신은 아마 사랑에 관심이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사랑을 믿거나, 사랑을 믿고 싶지 않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