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나무길을 벗어나 장릉길로 들어섰습니다.

6월의 장릉 후문길은 호젓함으로 사람을 유혹합니다. 아름드리 자란 나무들이 축축 늘어진 채 그늘을 드리웁니다. 그늘이 그리운 것을 보니 여름이라는 계절을 실감하게 됩니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니 저마다 모자나 썬캡을 쓰고 있습니다. ‘햇빛 가리개 모자’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사용하는 ‘썬캡’이라는 말을 쓰고보니 웬지 어색함이 느껴집니다.

햇빛은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요소이면서도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이기도 한가 봅니다. 오가는 아주머니들마다 안면을 덮어쓴 썬캡을 보는 마음이 그리 편치가 않습니다. 마치 복면이나 흑두건을 한 사람을 마주치는 느낌이 듭니다. 자외선이 얼마나 여성들의 피부를 괴롭히는 암적 존재인지 실감나면서도, 얼굴을 스치며 삶의 애환과 기쁨의 흔적을 느껴보는 상상력의 기쁨을 앗아간, 썬캡이라는 존재가 밉살스럽기만 합니다.

장릉숲이 가까워오면서 나무들이 뿜어내는 맑은 공기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입니다.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빨라집니다. 그러고 보니 가슴속의 폐뿐만 아니라 두 다리 역시 숲이 그리웠나 봅니다. 폐가 맑은 공기를 그리워한다면 두 다리는 아마도 흙이 못내 그리운가 봅니다.

하지만 발걸음을 재촉하던 두 다리는 갑자기 급정거를 하고 말았습니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 힘겹게, 아주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한 할머니를 본 순간,  두 다리는 숨을 죽이고 조심조심 그 옆을 지나갑니다.

‘혼자 오셨나?’

이 힘든 길을 혼자서 걷는 모습에 안스러움이 밀려와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면서도 결례를 범할까봐 멈칫합니다. 할머니 스스로 선택하여 나오신 길에 인생 후배의 감상어린 거드름이, 혼탁함을 더하게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할머니의 모습이 한없이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것은 언젠가 우리 역시 겪게 될 미래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 그럼 그렇지, 다행이다!’

한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뒤돌아 봅니다. 할머니에게 집중하느라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몇걸음 앞에서 할아버지의 양손은 빈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모습으로 할머니를 뒤돌아보는 할아버지의 눈동자에는 안스러움이 하나가득 배어 나옵니다.

‘어서 좀 걸어 봐, 당신 젊은 날처럼  당당하고 씩씩하게 걸어 보란 말야’

할아버지의 얼굴이 할머니를 향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휠체어의 빈 자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서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의자. 당신의 자리가 돼드리리다’

어릴적 불렀던 대중가요 ‘빈의자’의 가사가 떠올랐습니다. 그 노랫말에 나오는 ‘빈의자’는 ‘두사람이 와도 괜찮고 세사람이 와도 괜찮고 무더기로 와도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외로움에 지친 모든 사람들이 오더라도 자신은 다 안아줄 수 있다’고 자신있게 외칩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붙잡고 있는 휠체어는 그러한 자신감과 당당함보다 할머니의 지친 한쪽 삶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또하나의 지팡이 역할을 하기에도 힘겨워 보입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할아버지가 옆자리를 지켜주고 바라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그윽한 눈길에 젊은 날 고생을 시킨 것에 대한 미안함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평생의 반려자로서 할머니의 고단함을 함께 나누어 가지려는  애틋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혼’이라는 두 글자가 자연스런 일상적 용어로서 자리잡은 요즈음, ‘함께 걸어가는 삶’의 아름다움이 새삼스레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6월의 오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