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도록 혼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 창을 보니 모르는 전화였다. 영은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으로 흥분했다.

대뜸 만나자고 하는 그 남자!!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가....'

나이트클럽에 끌러가다시피 한 건 아마도 3차쯤 되었을 때다. 초저녁부터 마시다 은정이가 영은이를 끌고 간 곳이 요즘 한창 물 좋다는 강남의 '줄리아나'였다.

영은이와 은정이가 나이트에 등장하면 입구에서부터 목련꽃이 줄을 서 있다. 물론 영은과 은정이가 잘나가는 부잣집 딸이어서 매상을 팍팍 올려주는 그런 이유는 아니다. 순전히 예쁜 거 하나 때문이다. 어쨌거나 여자는 예쁜게 다라는 것이 웨이터들의 철칙이다.

데리고 온 은정이보다 끌려온 영은이가 더 설치고 다녔다. 참다 못한 은정이가 귀에 대고 소리질렀다. '야~! 한 테이블에 얌전히 있어. 너처럼 여기저기 다니는 애 한테 누가 계산해 주니?'

사실 지갑에 있는 돈으로는 턱없이 모자라 은정은 조금씩 초조해졌다. 그런데도 영은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돌아다니기만 했다.

영은이의 속아픈 마음을 은정이가 알 리 없었다. 며칠 전 우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결혼해서 책임질건데 어떠냐며 총각딱지(?)를 떼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물론 영은은 일언지하게 딱 거절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우진에게서는 전화도 뜸해지고 한 시간이 멀다하고 울려오던 메시지 신호도 그저 형식적이었다.

속으론 배신감도 느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순전히 따먹기 위한 작전으로 잘해준 거란 생각이 드니 우진이가 더욱 미워졌다. 남자는 다 늑대라더니…

한편 그토록 철통같이 지키려 하는 자신도 우스웠다. 온정인 지금 육개월 째 사귀던 남친과 계약 동거 중에 있다. 둘은 가끔씩 포한이 진 말도 서슴지 않는다. 또 얼굴이 부어 있는 날엔 이젠 정말 은정이의 동거 계약이 끝나는구나 싶으면 어느새 둘은 봄날의 졸음보다 더 못 말리게 손을 잡고 다녔다.

결정적인 순간이면 순결론자로 변해버리는 자신에게 은정은 집중 검토 대상자라며 자존심을 건드리기도 했다. 절대로 포기할 것 같지 않던 우진이가 그 집요함을 끝낸 듯하니 씁쓸한 기분이었고, 왠지 술래 없는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아 맥이 빠졌다.

우진에게서 연락이 끊어지자 먼저 전화해 볼 수도 없고, 마침 동거남과 싸우고 나온 은정이와 함께 이 나이트까지 오게 된 것이다.

영은이 마지막 룸으로 들어갔을 때,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 몽롱한 의식만 왔다갔다할 때였다. 들어서자마자 놀란 입을 마물 수가 없었다. 매끄럽게 쭉 빠진 완벽한 일등 감자의 포지션이었다. 서로는 영은이를 자기 옆에 모시려 했지만 그에게만 쏠리는 스포라이트를 불량 감자들이 알리 없었다.

앉아보니 훨씬 매력적이었다. '룰루~우진아 너 두고보자' 영은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직장이나 외모나 어딜 봐도 우진이보다 휠씬 나은 남자였다. 그는 자칫 숫총각이라고 했다.

"참 세상에는 우진이를 비롯하여 솟총각이 많구나 군대 가기 전다 띠는 게 그거라는데…' 영은은 진짜 웃긴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주는 대로 받아 마시던 영은이가 들어간 지 이십 분도 못 있다가 사건이 터졌다. 너무 마신 탓에 그 자리에서 오바이트를 하고 대자로 뻗은 것이다. 누군가 옷을 벗기고 닦아 주었다. 순결론자의 거기 만큼은 온전하게 보전되고 있는 듯해 의식의 마지막도 놓고 말았다.

다음날 한나절이 지나서야 핸드폰에 녹음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누나, 어젯밤엔 너무 많이 취한 것 같았어요. 근데 누나를 업고 간 남자가 술값 계산 다했구요, 수고(?)했다고 팁도 주었어요. 누나에게는 곧 전화 할거래요. 그럼 또 널러와요, 이쁜 누나."

간밤이 희미하게 스쳐갔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차에 탔다는 것, 손을 꼭 잡아 주는 느낌이 무척 따뜻했다는 것, 그는 당연히 옆에 있던 일등 감자이고 나를 업고 자신의 BMW쯤에다 태워다 주었으리라.

냄새 나는 오바이트 찌꺼기를 다 뒤집어쓰고 영은을 업고 집에 온 그에게 묘한 연민이 느껴졌다. 그를 보면 철통같은 보호본능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또 우진이쯤은 며칠 안에 다 잊을 것 같았다.

영은은 약속 장소를 향해 걸었다. 나비 한 마리가 머리 위로 날아 다녔다. 좋은 징조로 여겨졌다. 일등 감자를 만나기 백미터 전 자꾸만 소변이 마려웠다. '너무 긴장한 탓인가!" 마침 십 미터 전방에 화장실이 있었다.

창가에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엿다. '진짜 잘 골랐어! 넌 역시 일등 감자야' 영은은 흥얼거리며 화장실을 나왔다.

창가 앞 의자로 간 순간 마주친 거기에는 우진이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