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누가 부른다. 개울을 건너다 고개를 돌아보지만 소리의 흔적은 들리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초라한 그 날은 먼 회상 속 여름의 그날이다.

기억을 조르며 허름한 꿈속에서 흐린 광선처럼 의식을 깨우고 들어서는 사람의 정체를 섬짓한 마음으로 잠이 깨어서야 알게 되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다. 그리고 나를 깨운 소리는 빗소리였다. 잠귀가 밝지 못해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을 자지만, 가끔은 특별한 꿈이 개입된 이 새벽처럼 눈을 뜰 때가 있다.

가랑비도 아닌 억수 장마비가 쏟아지고 있으니 깊은 수면의 늪에서 깨어나 곤한 새벽을 뒤척이게 한다.

비를 기다리던 대지와 생활의 터전에는 반가운 손님이었다. 이제는 어느 마을 어느 동이 물에 잠겨 시름에 겨워하는 모습은 더 이상 저 비가 반가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불청객이 되어 버린 것을 비는 알고 있으려나!!

그러나 적어도 내 마음에서는 아름다운 소리요, 바라 보는 설레임을 주고 있다. 일상에서 가졌던 마음을 접어두고 비가 오면 웬지 다른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우울해지는 마음, 즐거워지는 마음, 그리고 그리움이 밀려오는 한숨까지도 사랑하게 된다.

밝은 아침에 비가 내리면 얼른 식탁을 치우고 커피 한 잔과 베란다로 나가겠지만, 늦은 오후에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할 것 같다.

그와 힘께 우산을 쓰고 걷는다. 지글지글거리며 빗소리만큼 리드미컬하게 소리가 나는 삼겹살집에 들어가 쓰디쓴 소주를 달콤하게 마실 것 같다.

소주라는 것은 묘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평소에는 쓴맛의 독을 느끼게 해 어쩌다 술자리가 생겨 소주잔이 앞에 놓여지면 살며시 치우고 도수가 약한 술잔으로 바꿔 놓는다.

그러나 좋은 느낌을 주는 사람과 마주 앉게 되면 주저 없이 소주를 청한다. 좋은 사람의 느낌은 쓴 소주의 성분마저 희석해 가는지 마셔도 마셔도 달콤하게 넘어간다.

그와 헤어져 갈 때에야 비로소 휘청이게 하지만, 그래도 즐거운 여운은 쓰린 속의 고통을 달래 준다.

오늘처럼 새벽에 내리는 비는 기억 저편에 있는 손목 하나를 잡고 싶어 한다. 고사리 손끼리 부딪치며 어느 순간 불꽃이 일어난 그 손으로 나는 눈부신 세상을 더 살고 있다.

그때는 여덟 살의 여름이었다. 장마비가 불어난 개울을 단지 놀이의 목적이었다면 건너지 않아도 되겠지만 학교로 가는 길은 위험해도 건너야 했다.

비가 올 때마다 개울은 나에게 공포였다. 끝도 없이 내린 비가 집으로 돌아 갈 때는 저수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제법 불어나 무릎까지 차 오르고 있었다.

친구들과 줄을 서서 차근차근 건너기 시작했다. 몇 번째인지 공포에 떨며 따라 가는데, 마음의 평형을 차릴 새도 없이 발 아래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빠른 급류를 헤쳐나가기엔 물살이 바위처럼 당당했다. 이제 죽는다는 생각에 소리치며 울었지만 아무도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겁에 질려 있던 친구들이 내 손을 잡지 못해 다시 되돌아가기를 반복했다. 한 뻠이 모자랄 만큼의 거리에서 내 목숨은 죽음을 향하고 있었다.

그 때, 이웃에 사는 한 친구가 다가왔다. 그 애의 손이 지푸라기 한줄처럼 가늘었지만 나에게는 동화 '해님 달님'에서 내려오는 동아줄 같았다. 썩은 줄을 잡고 오르다 수수밭으로 떨어진 호랑이도 있었지만 나는 다행히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 애가 내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생명의 은인에게는 시집가야 한다는 놀림이 이름표처럼 따라 다녔다. 시간이 지나 유년의 씁쓸한 기억으로 새겨있던 어느 날, 그 애가 먼 바다에서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비로소 그 애를 피해 다닌 것이 죄의식으로 다가왔다. 하필, 물속으로 떠나가다니… 그애가 살아있다면 이제는 부끄러운 마음이 사라졌으니 비 내리는 오후의 거리에서 한번쯤 만나도 될텐데.

어느덧 굵어진 손을 잡고 주저 없이 소주를 마시러 갈 수도 있을텐데…
나는 아직도 그 애의 무덤 앞에 초라한 꽃 한 송이 놓아주지 못하고 있다. 이 새벽, 마음 한켠을 서늘하게 깨우고 돌아서는 빗방을 속에서 그 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로 인해 나는 살아 있지만, 너는 나로 인해 이 세상을 먼저 떠난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