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석학원 최철호 원장

부부가 함께 늙어감은 행복이기도 하고, 늙어가는 아련함을 마주 바라보는 쓸쓸함도 있는 것 같습니다. 먹는 음식이 같고, 함께 산책하며 걷는 보폭이 닮아갑니다. 우리 부부가 함께 걸을 때는 마눌님은 항상 제 오른 편에 서서 걷습니다. 저도 누군가와 걸을 때 그 사람 왼 편에서 걷고 고개를 오른 쪽을 향해 쳐다보는 것이 편합니다. 사실은 제가 짝귀라서 왼쪽 귀의 청력이 상대적으로 오른 쪽에 비해 약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나 정신력같은 것도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자주 그런 일들이 목격될 때마다 부쩍 긴장을 하곤 합니다.

어느 해 12월, 공부하던 학교 (방송대학교 중국어과) 4학년 2학기 마지막 시간 시험과목을 치고 나왔습니다. 어학 공부라서 싫증도 나고 해서 몇 번인가 포기할까 하다 겨우 마지막 학기까지 끝낸 것이어서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시험장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탄 순간 함께 탄 아줌마 학우 두 분의 이야기 소릴 듣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시험지가 세 페이지 씩이나 되나?" 저런! 난 분명 두 장 짜리 시험지 25문제만 풀고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왔는데..... 수십 년을 다니며 늘 보던 시험을 그따위로 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방송대학교 기말시험은 항상 객관식으로 과목에 따라 35문항이나 25문항으로 되어있습니다. 10문제를 못 푼 그 과목은 겨우 과락을 면하고 졸업을 하긴 했습니다.

전 20 여년이 넘게 다니며 치룬 시험에서 그런 실수를 한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중국어 공부를 하며 성조나 한자 등을 외우며 반복 학습하는 게 지겨워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 감격스러워 흥분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날 집에 와서 그 이야기를 마눌에게 하니 마눌이 저를 빤히 쳐다보며 고백할 게 있다며 말합니다.

나 어떻게 하면 좋냐고 하소연을 하며 이야기를 한 전말은 이렇습니다. 우리 학원에서 20년 넘게 근무하신 선생님이 계십니다. 군인인 남편을 따라 강원도로 이사를 갔다가도 서울 쪽으로 전근을 오면 다시 우리 학원에 와서 근무할 만큼 가족같은 직원입니다. 얼마 전 마눌이 바쁜 일로 봉급날을 잊어버리고 있다 며칠 늦게 보냈답니다.

미안한 마음에 계좌이체를 하고 미안하단 문자를 보냈는데, 몇 분 후 그 선생님이 지난 달 것도 확인해보라는 문자가 와서 확인 해 보니 지난 달 것도 안보냈더랍니다. 자기는 학원이 어렵거나 뭔 사연이 있나 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저는 기가 막혀서 그 원장에 그 선생이라며 참 대단 들 하다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마눌은 이 일을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제게도 숨기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언젠가는 제가 심한 감기로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고 약국에 가서 감기약 처방을 받아 매끼 마다 꼬박 꼬박 식후에 약을 일주일째 먹어도 낫질 않았습니다. 가끔 약을 먹는걸 잊고 있으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내게 마눌이 약 봉지를 까서 손에 약과 물컵을 들고 주곤 했습니다. 그날도 절 쳐다보며 약을 주려고 다가와 "약 드셔야지요"하더니 잠간 동안 내 옆에 서서 함께 TV를 보는 것 같더니 갑자기 왼 손바닥에 있는 알약들을 자기 입에 넣고 오은 손에 든 컵의 물을 천연덕스럽게 마셨습니다. 나는 웃음이 나서 어쩔줄 모르고 마눌은 자기도 기가 막힌지 헛웃음을 칩니다. 약 부작용은 없이 끝난 해프닝이었습니다.

사십 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이런 일이 한번 도 없었던 일이 우리 부부 주변에 자주 나타나니 늙어감이 실감납니다. 부부가 오래 살다보면 약도 대신 먹어주는 사이가 되는가 봅니다. 아침마다 출근길에는 마눌님이 뒤따라 나서며 "핸·손·지·키·마(핸드폰, 손수건, 지갑, 자동차키, 마스크)"라고 주문을 외웁니다. 부부는 세월이 가며 늙어갈수록 보완재로 서로에게 필요하니 서로가 갈수록 살가워지나 봅니다.
 

<필자소개>

청석학원 원장 최철호(전 경기도학원연합회장)

* 학력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1개학과 졸업 (경영학, 영어영문학, 법학, 국어국문학, 행정학, 문화교양학, 
   교육학, 청소년교육학, 중어중문학, 일본학, 관광학)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 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