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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도 춥던 겨울이 끝나가는 노을빛이 봄이 되면서 저를 매일 제 정원인 김포평야로 이끌었습니다. 제 정원은 붉은 노을빛이 보라색 어둠으로 짙어 갈수록 미궁처럼 깊어 갔습니다. 저는 이 사색의 정원이 미로 속으로 안내해도, 멀리 보이는 도시의 번잡한 불빛들이 연상시키는 상념들이 가끔 괴롭혀도 언제나 거뜬하게 제 실존을 놓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으로 산책을 끝냅니다.
매일 봄볕이 길어지더니 하지가 지나면서 봄이 가고 한낮을 달구는 뜨거운 태양으로 여름이 깊어져 갑니다. 여름이 깊어져 가면 들녘은 풀들과 곡식들이 내 품는 생명의 에너지로 가득찹니다. 요즈음 저녁 무렵은 달빛의 명암으로 제 정원은 더 넓어 보입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저녁 8시 30분쯤 집을 나서서 10시쯤 돌아옵니다. 요즘은 특히 달빛 아래 개망초 꽃밭을 지나노라면 구름 위를 지나치는 것처럼 몽환적인 느낌입니다. 며칠 전에는 초승달이 오늘은 12시 방향에 상현달이 되어 떠 있습니다. 하루 하루 달의 크기 변화가 너무 뚜렷해서 하루 시간의 크기를 실감합니다.
달빛을 따라 걷다 보면 이 들녘의 나이가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김포평야는 수 억만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한강이 퇴적해온 충적평야입니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단단한 평면 위에 벼농사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 김포평야 위에 수로가 만들어지고 농로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는 100년쯤 될 것입니다. 수로의 혈관들을 따라 사람들의 생명줄인 밥을 만드는 논들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요즘은 논두렁의 잡풀조차 제초제로 정리되어 수로 가장자리 만 야생화와 풀들이 자라는 박제된 들녘입니다. 하지만 아마 수만 수천 년의 세월과 바람으로 유령처럼 배회하는 상념은 끝이 없는 듯합니다. 아마도 그런 연유로 제 고민들이나 작은 생각의 가닥들이 이곳을 지나는 바람을 쐬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맙니다.
언젠가부터 저는 이 들녘의 작은 풀과 꽃들마다 수천 년을 이어온 생명의 끈으로 연결되어 제게 나타난 인연으로 느껴집니다. 몇 달, 며칠이 지나면 형체도 없이 사라지지만 다시 계절이 오면 이 들녘 어딘가에서 또 다시 태어납니다. 수 많은 생명의 개체들이 혼자서 태어나 혼자서 어딘가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사라진 것이 이 들녘과 인연을 끊고 없어져 버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계절이 오면 그 자리에 똑같은 모습의 풀들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이 들녘은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득 차서 점점 넓어져 갑니다.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끝없이 치환되고 다시 현현되는 생명으로 유기물로 다시 무기물로 순환합니다. 이 많은 생명의 순환이 그럴진대 인간의 순환 또한 이 법칙으로 이어져 가리라고 여겨집니다. 이 들녘에서 자연의 순환을 바라보며 얻은 교훈을 새기고 체화하면 제가 죽음에 다다를 즈음엔 저도 제 죽음을 들풀들처럼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산책을 끝내며 달빛 속에서 피던 들꽃들처럼 피웠던 나의 상념들을 접어 작은 개울 여뀌 풀숲에 던져두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던져둔 내 상념들이 이 들녘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정원이 제겐 더욱 특별한 곳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이 산책을 쉽게 끝낼 수 없을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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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석학원 최철호 원장 |
달빛 산책
달빛이 들녘을 몰려다닌다
바람의 뒷꼭지에
수로 가 여뀌 풀숲,
달빛 한 무리
빠져 허우적거린다
찔래꽃 나무 넝쿨 아래
내가 숨겨둔 한 움큼 그리움이
바람을 따라 달려 나간다
아! 그대는 내게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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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청석학원 원장 최철호(전 경기도학원연합회장)
* 학력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1개학과 졸업 (경영학, 영어영문학, 법학, 국어국문학, 행정학, 문화교양학, 교육학, 청소년교육학, 중어중문학, 일본학, 관광학)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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