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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사와 걷는 김포 문화재 - 장릉
양미희 기자  |  suho@cit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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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20  15: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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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개로 꽃비가 아낌없이 내리던 4월 오후. 벚꽃 엔딩으로 유명한 장릉길을 따라 심호흡 가볍게 하고 오르자 세계문화유산 장릉이 품으로 들어왔다. 물을 머금은 장릉의 4월은 600여년전의 모습도 이러했을까.

장릉의 모습은 이곳의 주인 원종의 모습과도 닮았다. 당시 정원군이었던 그는 한때 아버지인 선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한다. 그랬던 그가 강화로 유배된 아들을 저승길로 앞세우고, 하루아침에 집을 뺏기는 수난을 겪으며 살았던 삶이 21세기인 지금에야 감을 잡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의 숨결이 장릉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원군의 파란의 삶과 아들 능양군(인조)의 효심, 그리고 장릉의 얼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장릉 알림이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김용남 해설사를 만나 우리가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는 끌림에 대해 들었다.

■ 김포장릉이 갖는 역사적 의미

김포장릉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현재 우리나라는 42개의 능이 있다.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을 제외한다면 남쪽에 40기의 능이 보존돼 있다. 대다수 능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분포돼 있는데 김포장릉은 이 범주를 벗어나 한강 건너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아홉 개의 능인 동구릉. 서쪽에 다섯 개의 능인 서오릉이 있죠. 여기서 십리 밖 백리 안쪽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김포장릉이 특이한 점은 이곳에 오기 위한 왕의 여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경복궁에서 공덕동 로터리로, 그곳에서 마포나루로,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고촌에 도착. 고촌에서 천둥고개를 지나 이곳 풍무동 산 141-1까지 왕의 행차가 이뤄졌다. 인조가 번거로운 여정을 뒤로하고 이곳에 선친을 모신 이유는 딱히 밝혀진 바 없지만 김용남 해설사는 김포의 기름진 땅이어서가 아닐까 했다.

“김포장릉의 또 다른 역사적 의미는 점은 추존 왕릉이라는 점입니다. 조선시대 추존 왕은 총 다섯으로 그 중 네 명은 모두 세자 출신이죠. 김포장릉의 능주인 원종만이 후궁 소생인데 당시 사대부들의 심한 반대가 예측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김포장릉이 역사적 의미를 갖는 건 유일하게 후궁 소생의 추존 왕릉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이곳은 500년이 넘는 왕조의 무덤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죠. 이런 문화사적 가치가 높게 평가돼 지난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꾸준한 관심과 보호가 필요한 곳이죠”

김포장릉을 포함한 조선왕릉은 우리 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인다. 자연과 더불어 있는 공간에 600여년전의 제례의식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살아 있는 우리의 문화다.

■ 능(陵)‧원(園)‧묘(墓)

조선 왕조의 능제는 능‧원‧묘의 삼묘제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그의 빈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원(園)이라 말한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 부른다. 그렇다면 김포 장릉은 선종의 다섯째 원종과 그의 부인 구씨의 무덤인데 어떻게 능(陵)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김용남 해설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정원군은 40세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맙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는 정원군의 맏아들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게 되죠. 그가 바로 제16대 임금 인조입니다. 인조는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종하기 위해 여러 반대를 무릅쓰죠. 우여곡절도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정원군은 왕으로 추존되고 원종이라는 묘호를 얻게 되었다. 원종의 무덤은 원래 양주에 있었으며, 인조가 즉위하자 흥경원의 원호를 받게 된다. 그 후 인조5년 이곳에 자리를 옮기고 1632년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면서 장릉으로 격상돼 능으로 불리게 되었다.

“김포장릉의 인현왕후 이전에는 원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능 아니면 묘만 쓰였죠. 인조가 왕이 된 후 돌아가신 어머니의 무덤을 묘라고 쓰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능이라고 쓸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인조가 생각해 낸 것이 원이죠. 원의 시초가 인현왕후의 육경원입니다”

그는 원에 있다가 능으로 된 사례가 유일하고 최초의 원이었다는 점은 김포장릉만이 갖는 가치라고 했다. 또한, 인헌왕후의 무덤은 지금의 위치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한다. 1627년이 돼서야 원종 옆으로 이장해 나란히 놓인 쌍릉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단다.

■ 원형에 가장 근접한 조선왕릉 유일한 연지

장릉의 매력은 연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왕릉에서 연지를 여러 곳 발견됐지만 가장 원형에 근접한 연지는 김포장릉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 당시의 원형에 가장 근접한 김포장릉의 연지는 다름 아닌 이희만 주무관이 복원한 겁니다. 그전에는 작은 습지에 불과했죠. 장릉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했던 장릉지에 보면 연지의 크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을 근거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된 것이 유일합니다. 이처럼 김포장릉은 자랑할 게 많은 곳이죠”

“구둣물의 전설도 있긴 하지만 지금 장릉에서 확인 된 우물은 두 개입니다. 어정이라고 제향을 할 때나 왕이 왔을 때 그 물을 쓰게 했죠. 다른 하나는 제정으로 제실에 있는 우물을 말합니다. 어정과 제정은 나중에 복원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 외에 또 다른 우물이 있는데 바로 구정이다. 구정은 지금 저수지 속에 묻혀 있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저수지는 근대에 와서 조성된 것이다.

우리 곁에 늘 가까이 있어 준 김포장릉. 추존왕릉이자 원에서 능으로 격상한 유일한 능. 조선왕릉 중 원형에 가까운 연지가 있어 역사적 의미가 더욱 선명한 곳. 바로 김포장릉이다.

김용남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듯 했다. 역사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거침없이 ‘미래를 예측하는 도구’라 답한다. 과거, 현재, 미래는 반복되고 있으며 해답은 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능의 주인 원종을 무척이나 닮았다. 지극한 효심과 애듯한 부성애 그리고 그의 고뇌. 김포장릉의 숨은 이야기를 들추고 나니 과거의 원종을 만나는 듯했다. 얄팍한 지식으로 장릉의 참모습을 모르고 있었음을 깊이 반성해 본다. 는개로 꽃비가 아낌없이 내린 4월 오후. 꽃비만큼이나 장릉의 참모습이 우리에게 쌓이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장릉의 숨은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준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 김용남 해설사에게 감사한다.

   
 
   
 
   
▲ 김포장릉 김용남 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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