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이 한창 이쁠 시기가 이즘이다. 제 이름 하나 기억하지 않아도 제 필 때를 알아 한해도 거르지 않고 피는 꽃들을 어찌 이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오란 꽃다지며, 희디 흰 봄맞이꽃과 아기별꽃의 앙증맞음을 볼 수 있는 시기도 이즘이다. 지천에 너무도 흔해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냉이꽃과 성질 급한 민들레는 이미 홀씨를 날린 녀석도 들 길 따라 함께하고 있다.

특히, 하성면 후평리 평야를 벗 삼은 여러 종의 들꽃은 오가는 이들의 무심함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후평리 들녘을 벗 삼아 살아가는 게 어디 들꽃뿐일까. 이번 씨티21뉴스 인터뷰는 들 길 따라 만나 문인화가 일곱 마리 길고양이 엄마, '초리먹그림터' 초리 최향순 작가다.

“일곱 마리의 길고양이의 엄마가 된 칠공주파 행동대장”

제방도로를 냅다 하성면으로 달리다 마주친 곳은 홍살문이 인상적인 카페 ‘들 길 따라’다. 고즈넉한 마을에 카페라니 좀 독특하지만 이곳이 바로 초리 선생의 작업실이다.

초리 선생은 동양화로 화폭을 접하고 현재 문인화 국전 초대작가로 활동 중이다. 그의 작품은 유독 힘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성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풍기는 힘은 남성작가들을 넘나든다.

“저는 일곱 자매 중 여섯째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는 유독 저에게만 남복을 입히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남자 아이들과 자치기며, 개구리 잡기, 나무에 올라 감 따기 등을 하며 동네를 누비고 다녔지요”

짧은 바가지 형 머리스타일에 양복, 그리고 나비넥타이. 초리 선생의 어린시절 모습이다. 아버지는 유독 여섯째에게만 가장이 하는 일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의 작품이 힘이 있는 이유는 어린시절 몸으로 익혓던 정서가 스며들어 있는 것 아닐까 싶다.

화폭의 세계에 사는 작가들의 어린 시절은 남달랐을 것 같은 예감은 한번도 틀린 적이 없다. 초리 선생이 붓 하나로 화폭을 평정하게 되는 데에는 떡잎을 알아본 스승이 있어서다.

“붓을 처음 잡을 당시 제 사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네 그림에서 힘’이 느껴진다고요. 당시 선생님 밑으로 제자가 셋이었는데 선생님은 가난한 제자에게 많은 용기를 주셨습니다”

문인화에 까막눈인 기자가 봐도 그렇다. 들꽃같은 체구인 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그런 그가 지금은 일곱 마리의 길고양이 엄마가 됐다.

“요즘은 고양이들을 보살피는 것에 큰 행복이죠. 열심히 살고 있어 돈 꾸러가는 형편은 아니니 누구에게 보시를 하겠어요. 저는 걔네들(길고양이)에게 합니다. 걔네들에게 사료 사다 먹고, 걔네들이 저의 동선 따라다닐 때가 제일 행복하지요”

인터뷰 중간중간에 고양이들의 소리를 듣고 ‘싸우면 안 돼! 사이좋게 놀아!’를 창문 너머로 보내는 그에게 엄마의 미소가 넘실된다.

“이론은 있지만 고정관념은 깨는 게 즐겁습니다”

현재 초리 선생은 김포북부노인복지관과 하성문화센터, 그리고 홍살문이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문인화를 전수하고 있다. 정적인 작업이라 단조로울 수도 있으나 그의 수업은 색다르다. 그것도 많이.

“수업 진행 방법을 바꾸는 걸 선호합니다. 보통 문인화는 주인공, 부주인공, 엑스트라 순으로 진행합니다. 어느 날, 방법을 거꾸로 해 보자 제안했지요. 수강생들은 어리둥절했지만 결과는 예상 밖으로 훌륭했습니다”

그가 복지관이나 문화센터에서 가르치는 수강생들은 하루에 한 작품은 꼭 완성한다. 가능한 일인지 의아했으나, 2시간 수업에 가능하단다.

“수강생은 대부분 어르신들인데 젊어서 먹고살기 바빠 그동안 하고 싶었던 미루고 미루며 살던 분들이죠.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이곳에 온 만큼 하루의 기쁨, 그날의 취미, 마음의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여주기 수업을 합니다. 수강생들은 보여주기 작품을 하고요”

수강생들은 취미로 시작한 문인화지만 연말에 되면 전시도 한다. 이 전시를 보러오는 자녀들과 지인들 앞에 그 어느 때 보다 당당한 어르신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나를 표현하는 것. 바로 ‘문인화’죠”

오래된 한옥이지만 홍살문에 반해 망설임 없이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한 초리 선생. 그는 3년 전, 그는 이곳에 카페 ‘들 길 따라’를 준비하고 수강생들을 위한 사랑방으로 내 준다.

“몸이 피곤하면 좋은 카페를 찾아 맛있는 차를 마시곤 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거뜬해지죠. 그래서 몸이 피곤할 때면 이곳저곳의 카페를 돌며 치유를 하는 편입니다. 아마 집시들도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사사의 마음이 제자에게 쏠리는 건 당연할 터. 그는 여기저기 흩어져 생활하는 수강생들이 이곳에서 치유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나보다. 부담 없이 찾아 와 차와 함께 이야기하며 힐링 할 수 있는 곳을 말이다.

정서적으로 차와 궁합이 맞는다는 초리선생에게 ‘문인화’는 한마디로 무엇이냐 물었다. 그는 ‘내 마음 속’이라 한다. 소나무 하나를 그려도 자신의 마음을 집어넣고 그리지 않으면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란다. 같이 시선을 두어도 각기 다른 작품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의미.

이 세상에 어찌 의미 없이 나온 것이 어디 있겠는가. 5월 하늘아래 무심히 핀 들꽃에게도 제 이름이 있으니 말이다. 초리 선생의 말처럼 자신의 마음을 넣어 그리지 않으면 자신만의 작품이 탄생할 수 없듯이 이참이 우리 곁에 너무도 수줍게 있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자신만의 작품이 될 테니 말이다.

홍살문에 반해 이곳 후평리에 작업실을 꾸린 문인화가 초리 선생. 차를 좋아해 이곳저곳 방황했던 자신을 집시에 비유하며, 자신을 선생으로 여기고 있는 수강생들에게 힐링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는 그. 그는 오늘도 일곱 마리의 길고양이 엄마를 자처하며 살아있는 모든 것에게 의미를 불어넣고 있다. 붓을 통해서 말이다.

홍살문이 인상적인 초리 선생 작업실. 툇마를 밑으로 일곱마리 냥이의 보금자리가 동글동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