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봉 선생이 법화경 작품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금값만 수천만원이 소요된 이 작품은 장차 문화재로 지정될 확률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인 1998년 5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총 길이 320미터에 이르는 법화경 전문 서예작품이 공개됐다. 조선조 한 승려가 '해서'로 옮긴 적은 있었으나 그보다 오랜 서체인 '예서'로 법화경을 옮긴 것은 최초였다. 장장 1년 6개월에 걸쳐 7만여자를 금박으로 써내려 간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예술의전당에는 불교 신도뿐 아니라 일반 관객까지 구름처럼 몰렸다. 서예전시로는 유례없는 인파였다.

작품을 완성한 창봉(滄峰) 박동규(67) 선생은 서귀포 출신 소암 현중화(1907∼1997) 선생 문하에서 서예를 공부했다. 서예가로는 처음으로 기념관이 건립된 소암 선생은 20세기 한국 서예의 가장 높은 곳을 빛낸 거장이다. 역시 제주 출신인 창봉 선생은 어릴 때부터 서예에 재능을 보였고, 중학교 3학년 때 교감의 소개로 소암 선생을 만났다. 소년 박동규를 데리고 간 교감은 서귀중학교 평교사였던 소암 선생에게 엎드려 존경을 표하고 그를 인사시켰다. 이때만 해도 창봉 선생과 인연이 이어지진 않았다.

붓끝이 예사롭지 않았던 창봉 선생은 능력을 살려보자는 친형의 제안으로 학교 졸업 후 페인트사업을 함께 했다. 간판글씨도 쓰고, 벽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가정집에서 작업을 하는데 어린 나이에도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일하는 그를 집주인 사모님은 "내 아들 하라"며 무척 귀여워했다. 며칠 후, 같은 집 먼발치에 소암 선생이 보였다. "소암 선생이 아니시냐"고 사모님에게 물으니 "네가 어떻게 아느냐"며 깜짝 놀랐다. 퇴직 후 작품활동에 전념하던 소암 선생과 그렇게 우연히 재회했다. 소암 선생 내외는 곧바로 방을 내줬고, 입대할 때까지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을 정도로 주경야독하며 서예를 배웠다.

창봉 선생은 "그때가 인생에서 제일 열심히 살았던 시기였던 것 같다"고 했다. 군대에 가니 오히려 편했다는 것이다. 소암 선생은 나라가 필요할 때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뜻의 '호국즉아' 글을 써주며 몸에 지니라고 당부했다. 해군이었던 터라 물에 젖지 않도록 비닐에 싸서 꼭 품었는데 소지품 검사에서 적발됐다. 연유를 알게 된 간부들은 그에게 부대 내 글씨 작업을 도맡겼다. 바다 건너 면회를 올만큼 그를 많이 아꼈던 소암 선생은 전역 후에도 계속 서예혼을 전수했다.

이후 창봉 선생은 스승과 상의 끝에 1985년 서울로 왔고, 서화연구기관인 '동방연서회'에 몸담으며 또 다른 서예 거장 여초 김응현(1927~2007년) 선생을 사사했다. 1988년에는 KBS휘호대회 대상을 비롯해 서예대전 우수상, 국전 및 동아미전 특선을 휩쓰는 등 서예대가로 이름을 새겨갔다.

올해 초 한국서예가협회장에 취임한 창봉 선생은 지난 2015년 김포시 금빛수로변에 창봉서법연구원을 차리고 터를 잡았다. 이곳에서 그는 당대 최고 작가들이 직접 쓴 휘호로 건물과 정자 현판을 품격 있게 디자인하고 해석까지 곁들이는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다. 창봉 선생은 "대한민국 관문이자, 외국인들에도 익히 알려진 지명인 김포에 국제적으로 어울리는 종합예술관을 조성해보고 싶다"는 희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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