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라이프
해설사와 걷는 김포문화재 - 덕포진
양미희 기자  |  suho@city21.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05.19  18:33:01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오월의 오후는 아카시아 꽃 향으로 물든다. 굳이 동구 밭 과수원길이 아니더라도 김포 곳곳에 배인 아카시아 향은 700여 년 전 향 그대로이리라.

프랑스군과 미국군을 방어하기 위해 접전이 있었던 곳. 그리고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목숨으로 알린 손돌의 모습이 오월의 햇살 아래 숨 쉬고 있는 곳. 바로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 있는 덕포진이다.

우리가 그리고 있는 덕포진은 어떤 모습인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중요 접전지이자 손돌의 전설로만 기억되고 있지나 않은지. 그렇지만 덕포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사연과 기다림이 존재했던 곳이다. 그 사연과 기다림을 발굴한 김기송 해설사와 함께 덕포진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숨은 이야기를 들었다.

■ 고려 고종이 무릎을 치고 슬퍼한 이유

조선시대 외세침입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던 덕포진. 이곳은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앞으로 두고 있는 진지로 프랑스와 미국의 군함을 방어하기 위해 격렬한 전투를 치른 곳이다. 소용돌이는 물살이 바로 손돌목으로 그 전설이 애잔하다.

“손돌목은 인천 앞바다에서 마포나루까지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입니다. 이곳 신안리에서 강화 광성보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이죠. 평상시 세곡을 운반하는 뱃길이지만 전쟁 시에는 적을 방어하는 중요한 곳입니다”

몽고의 부당한 조공 요구에 불복해 항전할 것을 결심한 고려 고종은 강화로 파천하게 된다. 그는 충신들과 함께 개경을 떠나 예성강 벽란도를 거처 뱃사공 손돌의 배를 타고 강화로 가려 한다. 김포 신안리와 강화 광성진 사이 해협에 오자 물살이 거세진다. 지형 또한 앞이 막힌 듯 보이자 고종은 자신의 목숨을 앗으려 하는 것으로 짐작한다.

“고종이 손돌을 의심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충신들은 수차례 뱃길을 바로 잡도록 손돌에게 지시했으나 물살이 어디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까. 손돌은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조금 더 나가면 길이 트인다 진언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이 초조해진 고종은 결국 손돌을 그 자리에서 참수하게 되죠”

죽음을 앞에 둔 손돌은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바가지를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 것이라며 숨을 거둔다. 왕과 그 일행은 물살을 읽을 수도 없고, 뱃사공도 없는 상황에서 손돌이 알려 준 대로 바가지를 따라간다. 잠시 후 기적같이 목적지에 다다르게 되자 고종은 무릎을 치고 후회한다. 충성스러운 백성을 잃었다는 슬픔에서다.

■ 충(忠)의 기본은 효(孝)

김 해설사는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사비를 털어 신명학당을 세우고 손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충(忠)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손돌의 비석을 세우고 그의 충절을 기리는 추염제를 열었다. 이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매년 10월 20일 진혼제가 이곳 손돌묘에서 진행된다.

“손돌의 충성심을 자라는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신명학당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충보다는 효가 우선이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나라에 충성할 수 있는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뱃사공 손돌도 무척 효자였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김 해설사는 서산에 있는 해미산성, 공주에 있는 공주산성, 고창에 있는 고창읍성, 낙안에 있는 낙안읍성이 부럽단다. 그들은 너무도 아름답게 보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포대가 있던 덕포진 또한 성곽을 이뤘을 법한데 토성이다 보니 그 형태가 사라져 버렸다며 복원에 힘쓰고 있다.

“토성이다 보니 주변 논과 밭에 유입돼 희미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포대만 남아 있는 거죠. 이를 복원해 흙을 쌓고 때만 입히면 역사적 토성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덕포진의 본진을 복원해 한양을 지켰던 김포의 역사를 굳힐 수 있는 거죠. 온전히 복원된 모습을 후손에게 남기고 싶습니다”

그의 말처럼 덕포진은 아직 미완성의 역사물이다. 해미산성, 공주산성처럼 우리 김포의 소중한 역사가 하루빨리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싶다는 마음은 그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 손돌의 혼이 무지개로?

그런 김 해설사에게 손돌의 혼이 말해주는 것일까. 우연히 덕포진 포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몸으로 부딪친다. 정확한 위치도 파악되지 않았지만, 그는 마음이 조급해 삽부터 들었다. 몇 개월이 지났을까. 꿈에 손돌이 나타나 무지개를 띄운다. 그 장소가 바로 지금의 나포대 자리다.

“묘하게 나진지 부분 고총처럼 보였죠. 매일 그곳을 보면서 초점을 맞추었지만 알 수가 없었습니다. 9월 28일 꿈에서 나진지에서 무지개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추수를 하기 위해 불러온 일꾼들에게 나포대를 파라고 했죠. 오후 2시 경 4~5m를 파 들어가니 신기하게도 지금 나포대에 있는 화강암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 그러나 기쁨도 잠시. 당시 문공부의 반응은 냉담했다. 농사꾼인 자신이 문화재에 손을 댔다는 얼토당토 않는 이유에서 발굴작업은 중단된다. 도굴범으로 몰리게 된 상황에서 9년을 흘려보낸다.

끝없는 그의 건의 덕분이었을까. 다시 발굴 작업을 시작한다. 그러자 화포 3문과 포대 15개소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이어 화포 3문이 다시 발견되고 각 포대에 불씨를 공급했던 파수청과 7개의 포탄, 상평통보 2개가 출토된다. 그리고 1980년 11월 사적 제292호로 지정된다.

“화포는 총 6문이 발굴되었습니다. 현재 김포시에서 보관하고 있는 화포는 2문뿐이죠. 나머지 4문은 역사적 가치를 함께하기 위해 독립기념관, 전쟁기념관, 중앙박물관, 육사박물관에 보존돼 있습니다. 전국 여러 곳에서 덕포진의 가치를 재차 확인할 수 있죠”

그 후, 덕포진전시관이 개관하고 덕포진수련장도 개설 됐다. 사담이긴 하지만 당시 발굴한 화포를 중국과 일본 사람들이 와 자신들에게 넘기라는 제의도 받았다고 한다. 당시 한화 30억을 줄 테니 제발 팔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야기.

■ 약물터‧원둘터‧굽두리

약물터, 원둘터, 굽두리…. 낯선 단어지만 덕포진의 가포대, 나포대, 다포대를 예전에는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옛 땅 이름이었죠. 포대가 발굴되고 사적으로 지정하려니 좀더 명확한 이름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가포대, 나포대, 다포대로 명명됐죠”

그가 덕포진의 포대를 발굴하고 조성되기 전까지 이곳은 사과밭이었다. 사유지에 유적이 발굴되었으니 내 놓으라 하면 그 누가 쉽게 허락할 수 있겠는가. 끝없는 그의 설득과 권유 끝에 이곳은 대한민국에서 빠지지 않는 경관을 자랑하는 유적지가 됐다.

“통진읍지에 의하면 덕포진은 군사상 강화 통어영에 속하고 행정상으로는 통진에 속하는 이원체제였습니다. 규모는 첨사 1명과 수군 316명, 방선 2척, 병선 1척, 사후선 3척을 보유하고 있었죠. 그들을 수용하던 건물은 객사, 내외진사 또는 삼문과 행랑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포대와 돈대 사이에 파수청 4칸이 건립되었죠”

“덕포진 토성을 복원하려니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단 하나의 힌트는 우물이 있던 자리죠. 약 300여명의 식수를 제공했을 우물은 큰 소득이었습니다. 그러나 땅 주인이 묻어 버렸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역사적 현장을 복원하기란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정부의 지원은 물론 주민의 인식변화도 중요한 듯하다.

교육이 무엇이냐고 묻자 ‘자연 속에서 받는 교육이 진정한 교육’이라 한다. 인간은 아름다운 자연하고 살아야 하며 그 속에서 안보교육과 충효교육이 이어져야한단다. 문화재의 소중함을 넘어 후세에게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나이는 올해 86세다. 자연과 벗 삼아서일까 오가며 만나는 관람객에게 막힘없이 손돌목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하고, 덕포진의 숨을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덕포진을 걷는 내내 멧새가 지저귀고 상큼이 올라오는 오월의 풀냄새가 관람객을 반긴다. 땅 밑에선 두더지가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잣나무에 잣이 익어가고 있다. 하지만 덕포진은 아직 미완의 상태. 그의 바람처럼 본진이 온전하게 발굴되는 그 날을 기다려 본다.

마지막으로 쉬는 날임에도 덕포진이 궁금하다는 기자에게 한 걸음으로 달려와 주신 86세 김기송 문화해설사께 무한 감사드린다.

   
 김기송 문화해설사
   
 가포대
   
 
   

 

   
 나포대

 
 나포대에서 발굴된 화문석
   
손돌묘

 

 

 

 

 

 

 

 

 

 

 

 

 

 
 
   
 

양미희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최근 인기기사
1
김포시설관리공단 초대이사장 조성범 씨 내정
2
김시용 의원, 국지도 84호선 건설예산 210억원 확보
3
“우리 결혼했어요!”
4
김포시 모델하우스 ‘떳다방’ 집중 단속
5
이진민·신명순 의원, 경기도 시·군의원평가 최우수상 수상
6
‘생명·평화·통일’ 희망을 담다
7
홍철호 의원, 대곶면서 농촌봉사활동
8
유영록 시장 "신곡수중보 철거, 한강 물길 복원"정부 건의
9
하성면 '우리동네 밤마실 가자' 공연
10
통진읍, 11개 기관과 복지협력 업무협약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게시판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등록번호: 경기 아 50303 등록일: 2011.11.15 발행인·편집인: 전광희 청소년보호책임자: 전광희
주소: 경기도 김포시 사우중로 48 드림월드프라자 704호 Tel: 031)998-6161 Fax: 031)984-7117  |  이메일 : jkh@city21.co.kr
Copyright © 2004 씨티21. All rights reserved.